
“처음에는 말을 안 했는데… 아이들은 다 알더라고요.”
박장연씨(53·가명)는 2005년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왔다. 경기 광명시에서 딸 둘, 아들 하나와 같이 산다. 아이들은 탈북 과정을 거치며 중국과 한국에서 태어났다. 박씨는 “아이들은 말투를 보고 이미 눈치 챘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20대인 박씨의 큰 딸은 중1 때 친구에게 “너희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고 하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가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게 뭐 어떠냐고 친구에게 반문했다고 하더라고요.”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한국에서 자녀를 키우며 더 큰 어려움과 보람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이다. 이들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혹시 아이들이 싫어하거나 주변의 눈치를 볼까봐 북한에서 왔다는 사실을 선뜻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들도 교육비를 가장 큰 부담으로 느꼈다.
최진혜씨(51·가명)도 “아이들이 충격받거나 위축될까봐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고3 자녀가 있는 최씨는 2002년 북한에서 남한으로 왔다. 그는 “제가 사투리를 쓰는 것도 있어서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것을 (아이가) 안 좋아하고 그랬다”고 했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우는 김미숙씨(52·가명)도 “자녀들이 친구와 통화할 때 북한 억양이 들리는 걸 싫어했다”며 “억양을 고치려고 스피치 교육을 따로 받았다”고 했다.
남북하나재단이 공개한 2024년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를 보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온 주민 4명 중 3명(75.3%)은 여성이다. 자녀가 있는 북한이탈주민 중 스스로를 주 양육자로 꼽은 여성은 91.4%였다. 그런데 박씨와 최씨를 비롯해 자녀를 키우는 여성 북한이탈주민 대다수는 자녀에게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지 않았다.
여성들은 “학교에 가거나 학부모와 마주칠 일이 엄마들에게 더 많기 때문”에 북한에서 온 사실을 자녀에게 알리지 않는다고 했다. 박씨는 “아빠들은 학부모회의 등에 참석할 일이 없으니 교사나 학부모와 마주칠 일도 없다”며 “엄마가 북한에서 왔다는 게 학교에 알려지면 대북관계에 따라 자녀에게 미칠 영향도 걱정됐다”고 했다. 최씨도 “엄마들이 더 자녀에게 (북한에서 온 사실을) 쉬쉬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자녀를 양육하면서 마주치는 사람이 많으니까 더 조심하게 됐던 것 같다”고 했다.
이들은 자녀를 키우며 미안하고 후회스러운 감정과 북한에선 할 수 없었던 교육을 해줄 수 있어 다행스러운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김씨는 지금은 성인이 된 큰 딸이 학창시절 “욕심이 많아 일요일까지 피아노부터 학원을 6~7개씩 다녔다”고 했다. 김씨는 “저는 이것도 저것도 하고 싶었는데, 제 딸 아이가 그걸 다 하겠다고 해서 대리만족을 했다”고 했다.
남한의 높은 사교육비에 “자녀들이 원하는 학원을 충분히 보내지 못한 미안함”을 표하기도 했다. 자녀 셋을 키우는 박씨는 “영어, 수학 (학원)은 기본이기 때문에 한때 부부 소득의 절반 이상을 학원비에 썼다”고 했다. 피겨 스케이팅을 하고 싶어 했던 둘째 딸에게 지원을 못 해준 미안함이 여전히 크다. 박씨는 “북에서는 부모들이 자녀를 먹이고 입히는 데 집중한다”며 “한국은 아이들이 공부하겠다는 데 학원을 안 보내면 부모로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 오히려 학교 선생님들이 ‘영어학원 안 보내냐’고 해 황당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자녀를 키우며 가장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교육비였다. 2024년 북한이탈주민 실태조사를 보면 ‘자녀 양육의 어려움’을 묻는 질문에 72%가 ‘양육·교육비용 부담’을 꼽았다. 자녀 양육에 필요한 지원으로는 ‘경제적 지원’(55.3%)이 필요하다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북한이탈주민의 월평균 임금은 262만원으로, 전체 평균보다 50만원가량 적다. 친척 등 가족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점도 이들의 양육 부담을 더한다.
그래도 다 큰 자녀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위로를 받거나 바뀐 세상을 느낀다고 했다. 박씨는 최근 대학생인 큰 딸에게 탈북 과정을 설명하자 “우리 엄마가 한국에서 처음부터 살았으면 큰 일을 했을 사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씨는 “큰 딸과 대화를 하면 종종 감동을 받기도 하고, ‘여자가 그게 뭐냐’고 하면 ‘요즘엔 어디가서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