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 15일 이후로 한인들이 사욕과 파당성을 버리고 서로 끌며 서로 밀어주어 한 궤도를 나갔다면 누가 방해했을 것인가. 오늘부터 새로 결심하고 민족 대단결만 하루바삐 성취하면 우리 국권을 우리의 능력으로 회복할 것이다.” 좌우익의 이념 대립으로 혼란이 극심하던 1946년 8월 15일 이승만 박사가 해방 1주년을 기념하며 밝힌 소회다. 백범 김구 선생은 “세계 정세의 복잡다단함에 생각을 미치고 건국 1년의 형극의 길을 회고할 때 무의미한 감격과 흥분과 열광보다 냉철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국제적 정세와 민주주의 대세에 순응해 파벌적 편견, 개인적 오류를 청산하고 민족이 한 덩어리가 돼 각자 온갖 힘을 경주하자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새로이 해야 한다”고 외쳤다. 독립과 구국에 헌신했던 두 애국지사에게 8월 15일은 해방의 기쁨을 곱씹기보다는 위태로운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위한 각오를 다지는 ‘각성’의 시간이었다.
해방 후 80년이 지나면서 8월 15일이 갖는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다. 많은 사람들에게 광복절은 그저 8월의 공휴일일 뿐이다. 그 정도면 차라리 낫다. 언제부터인가 광복절은 대일 외교와 대북 노선, 역사 인식 등을 놓고 보수·진보 진영 대립이 불을 뿜는 ‘분열의 날’이 됐다. 모든 국민을 아우르며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할 대통령 경축사조차 이념 편향에 물들어 논란과 정쟁을 부추기는 화근이 되기도 했다. 혼란상은 지난해 극에 달했다. 대통령의 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에서 촉발된 친일 논란과 이념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격화해 급기야 광복회와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광복절 경축 행사에 불참하는 초유의 사태마저 벌어졌다.
계엄과 탄핵의 혼란을 딛고 다시 맞는 8월 15일은 80주년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광복절이다. 이 뜻깊은 날에 이재명 대통령이 들이는 공은 남다르다. 대선 승리 후 별도 취임식 없이 부랴부랴 국정을 추스르기 바빴던 이 대통령은 올해 광복 80년 경축식에 ‘국민 임명식’이라는 대통령 취임 행사를 얹어 ‘국민주권 대축제’라고 이름 붙였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는 ‘국민주권국가’의 상징적 이벤트에 국민 통합의 의미를 담기 위해 구속·수사 중인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를 제외한 역대 전직 대통령 부부와 유가족, 국민 1만여 명이 초청됐다.
하지만 올해도 분열의 그림자가 이미 짙게 드리웠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전 대표와 윤미향 전 의원 등을 ‘광복절 특별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이 대통령의 결정에 맞서 국민의힘이 ‘국민 임명식’ 불참을 예고하자 민주당은 ‘대선 불복’이라고 날을 세우고 있다. 대통령실은 “국민 통합이라는 시대 요구에 부응한 사면”이라고 했지만 ‘보은(報恩)’ ‘내 편 챙기기’ 논란이 거센 올 광복절 특사가 국론 분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언론·검찰·사법 개혁과 경제적 파장이 큰 노란봉투법을 밀어붙이는 민주당의 행보를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국민들은 이번 사면을 납득할 수 있을까. 대축제가 펼쳐질 8월15일 서울 도심에서는 각각 ‘내란 청산’과 ‘독재 저지’를 외치는 진보·보수 단체의 집회가 예고돼 있다.
우리의 국력과 위상은 8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강도는 두 애국지사가 ‘결심’을 촉구하던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 경제·안보를 의존해 온 미국은 80년간 이어져 온 자유무역 체제의 종언을 선포하며 우리 수출에 직격타를 날리더니 이제 주한미군 축소와 역할 조정 카드로 안보마저 뒤흔들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과 북중러 밀착으로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은 날로 심화하고 있다. ‘내 편’만 챙기고 정치적 이해 득실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2005년 8월 15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제60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갈등과 분열 구도로는 나라가 발전할 수도, 위기에 대처할 수도 없다”며 정치의 결단을 호소했다. 특정 집단만 의식하는 정치 편향이 앞으로도 반복된다면 국론 분열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정부의 국정 동력도 급격히 약화할 수밖에 없다. “통합은 유능의 지표, 분열은 무능의 결과”라고 단언한 이 대통령은 어떻게 ‘분열의 강’을 건너 빛을 되찾을(光復)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