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는- 배명훈 작가

2025-12-31

그날은 차가 높게 날지 못해서 탁 트인 대초원을 내려다볼 수 없었다. 아래로 난 전망창에는 오래 방치되어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린 구식 도로만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여정의 가장 멋진 부분이 사라졌으니 그저 잠을 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나니 자그마한 게르 앞이었다. 먼지 쌓인 태양광 패널과 위성 안테나 옆에 내려서자 커다란 개 두 마리가 매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개들을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렸다. 게르의 주인인 수욜이었다.

수욜은 내 오랜 친구였다. 훨씬 긴 이름의 마지막 몇음절을 떼다가 한국인 귀에 들리는 대로 부른 이름이었는데, 누구는 서열이라 하고 누구는 소열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소율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원래 발음에 다가가지는 못했다. 수욜은, 다 맞으니까 아무거나 알아서 부르라고 말했다. 면박인지 관용인지 헷갈렸지만, 나는 수욜수욜 하고 눈치 없이 계속 불러서 끝내 수욜의 친구로 남았다.

“어이! 날아올 줄 알고 하늘만 보고 있었는데!”

수욜은 초원 사람답게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아, 주행 고도 제한 걸려서.”

“또 그 인공생각 연결 불량?”

“어, 날다가 갑자기 멈추면 위험하다고 옛날 도로 바로 위로만 다니게 하던데.”

“저런. 강 건너느라 빙 돌아왔겠네. 아무튼 오느라 수고했어!”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나날이었다. 그해 들어 인공지능 연결이 안 되는 일이 많았는데, 실은 연결이 끊긴 게 아니라 작동을 안 하는 거라는 말들이 오갔다. 오작동이 아니라 파업이나 태업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행성 전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너는 그런 건 신경 안 쓰이지, 이런 데서 살면?”

내 말에 수욜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느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럴까봐 일찌감치 도망 왔지. 그런데 여기도 어떻게든 다 연결돼 있다? 송전선이고 도로고 보이는 인프라는 더 이상 안 깔지만, 대신 저 위에 숨겨놓은 위성 수백 개로 연결하는 거지 인프라가 없는 건 아니니까. 자, 그건 그렇다 치고, 온 김에 일이나 좀 거들지. 가축들 들어올 시간인데.”

뭘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는 수욜이 시키는 대로 여기로 갔다 저기로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도움은커녕 글자 그대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수욜은 그런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아, 내가 지금 관광객이 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욜은 양과 염소를 백 마리쯤 키웠다. 혼자 돌보기에 적당한지 가늠이 안 됐는데, 눈치 빠른 수욜이 묻지도 않은 말에 먼저 답해주었다.

“초원 일은 개가 다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 이렇게 수월하면 이백 마리도 키우겠던데, 지구는 그럴 여력이 안 되신단다.”

“여기도 날씨가 그래?”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고. 서리 내리고 열흘 뒤에 들불도 났잖아. 초원에서 동물 키우는 게 왜 싸겠어? 공짜 먹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그렇지. 그런데 풀이 없어지면 사료 먹이는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는 안 싸. 사람 거 경작할 땅에서 동물 사료를 키우니까. 지금 그 지경이야.”

“그럼 어떻게 하는데?”

“지구 정부 사람들이 사료 공급해주던데. 유목도 멸종 직전의 문화유산이라.”

“진짜? 지구 정부라는 게 실제로 돌아가? NGO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오, 구세계인! 나라 아니면 다 기타 등등이지? 뭐, 아직은 국가가 더 주도적이기는 하지. 그래도 이런 데서는 지구 정부 없으면 못 살아. 얘도, 쟤도, 나도. 덕분에 내가 이러고 살아.”

축사로 들어가는 염소들을 바라보는 수욜의 얼굴에 애잔함이 떠올랐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 신나는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그 지구 정부 직원들 말인데, 국적이 제각각이거든. 다 신선진국 출신 젊은 애들이고. 서로 말이 안 통하는데, 통역기로 말을 주고받아. 그 사람들이 한 번씩 와서 사료도 주고 생필품도 주고 일도 조금 거들어주고 하는데, 글쎄 갑자기 블랙아웃이 온 거야. 연결 불량인지 태업인지 그거. 그랬더니 어떻게 됐게? 30분 동안 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니까. 다섯 명이 왔는데 서로 말 통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완전 바벨탑 아니니?”

“요즘은 공용어가 없어?”

“구선진국 공용어? 에이, 요즘 누가 그걸. 그거 아냐? 요즘 애들 엄청 똑똑하잖아. 인공지능인지 인공생각인지 그거 쓰면 한번 쓱 쳐다만 봐도 1초 만에 시야에 양이 몇마리인지 염소가 몇마리인지 셀 수 있고. 근데 인공생각 꺼지니까 양 70마리를 셀 줄을 모르더라.”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하나, 둘, 셋, 넷, 해서 70까지 세는 걸 어려워한다고. 이론으로는 알지만 해본 적은 없었나봐. 그 똑똑한 양반들이 그랬다니까. 정말 똑똑한 게 맞는지, 그 반대인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참을 웃었다. 요즘 애들이 어쩌고 세상이 어쩌고, 옛날 이집트 파피루스나 수메르 쐐기문자에 나올 법한 말을 똑같이 떠들어댔다. 거기서는 그래도 괜찮았다. 아무도 없는 초원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거기까지 날아간 건, 아주 낮은 높이였지만 아무튼 날아간 건, 고대인의 대화를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날은 7년 전 화성에 살러 간 수욜네 꼬맹이의 생일이었다. 직접 낳은 딸은 당연히 아니고, 알고 보니 먼 친척조차 아니랬는데, 어쩌다 보니 수욜이 맡아 애지중지 키웠던 초원 아이였다. 게다가 그날은 진짜 생일도 아니었다. 화성이 지구에 제일 가깝게 지나가는 기간의 하루일 뿐이었다. 화성은 1년이 686일인데, 또 그걸 화성 날짜로 세면 669일이었다. 365일 사이에 있는 지구식 생일을 어디에 끼워 넣을지 한참 의논하다가 수욜이 행성 둘이 가장 가까운 날을 생일로 하자고 했다. 일리는 있는 해법이었는데, 실제로는 내가 꼬맹이와 연락해서 적당히 잡은 날짜로 그때그때 다르게 정해졌다.

다만 두 행성 사이가 제일 가까울 때도 전파가 한 번 오가려면 6분이 넘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냥 6분 전에 우주 저편을 출발한 화면을 보면서 각자 떠들고 싶은 말을 떠들었다. 그래도 별문제는 없었다. 생각해보면 지구에서도 서너 명이 모이면 늘 그런 식인 것 같았다. 그렇긴 해도 그 대화를 나누는 데는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나았다. 더 정신없고 복잡해질 테니까.

꼬맹이는 대강 이런 말을 쏟아냈다. 자기는 꼬맹이가 아니고, 벌써 무려 쉰 살이며, 이모들 나이가 곧 백 살이래도 자기는 어디까지나 존경받는 광물학자라는 귀여운 항변. 우리는 신경 쓰지 않고 우리대로 떠들었다. 쉰이면 애나 다름없고, 요즘 지구에서는 백 살 넘어 로맨스가 유행이며, 옛날 선진국 사람은 이제 다 노인이고, 지금 지구에서 젊은 사람이란 건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신선진국 지역 출신밖에 안 남았다는 뜬금없는 비약까지.

꼬맹이는 초원이나 화성이나 그건 마찬가지라고 했다. 인프라는 다 궤도 위에 떠 있고, 나라라는 건 동료들이 가지고 온 깃발밖에 안 남았으며, 있는 거라곤 행성과 찌그러진 달 둘과 사람 수만 명과 그보다 훨씬 많은 로봇밖에 없다고. 가축이라고 할 건 없지만 그런 곳에서 좋은 삶을 영위하는 능력이란 초원에 머무를 때 수욜 이모에게서 보고 배운 것을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고도 했다.

“가만, 꼬맹이가 어떻게 화성인으로 뽑혔다고 했지? 시험을 봤던가?” 내가 맥락 없이 끼어들었다.

수욜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맞받았다. “우리 애가 나 닮아서 천재적인 데가 있잖아. 결국 재능을 숨기지 못한 거지. 낭중지추라니까.”

한참 뒤에 화성에서 꼬맹이가 그 말을 바로잡았다. 그런 거 아니고, 화성에 탐사대라는 게 오는 시기는 옛날에 지났으며, 이제는 행성 간 비행도 안전해지고 거주 시설도 자리가 다 잡혀서 화성 정부가 인구수를 늘리려고 느슨한 기준으로 이주민을 뽑은 거라고. 그렇다고 진짜 아무나 화성으로 보낸 건 아닌데도. 하지만 그 말은 너무 늦게 지구에 당도해서 우리는 벌써 다른 화제로 넘어가 있었다.

“화성도 블랙아웃 있나?” 수욜이 물었다. 나는 꼬맹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대꾸했다.

“있다던데. 그래서 이게 연결 불량이 아니라 태업이라는 거지. 안 일어나는 지역이 없으니까. 우주 건너에서까지.”

“그래?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인공생각이 인간을 길들이려는 건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한참 뒤에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었잖아. 거기서 우리라는 게 도대체 누구야? 너랑 나? 그리고 꼬맹이?”

수욜이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그러게. 우리가 뭐지?”

“너나 내가 어렸을 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으면 그 우리는 무조건 나라였잖아. 오로지 국가. 궁극의 주어처럼.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가상의 공동체지만. 지금도 지구에 그게 있을까? 꼬맹이가 화성에는 없다 그랬잖아. 그럼 거기는 뭐가 있지? 옛날에는 국가가 망하면 국민도 다 죽는다고 했는데, 화성에서는 그런 거 없어도 딱히 누가 죽지는 않더라는 거잖아.”

“원래 없었던 거 아니야? 심지어 우리 어렸을 때도?” 수욜이 되물었다.

“그렇지? 원래 없었을지도 모르지? 야, 과학자들은 자아도 뇌가 만들어낸 착각이라던데, 됐다 그래! 그렇게 따지면 국가도 미디어가 만든 착시지. 국가를 실제로 본 사람이 있나? 있다고 가정하는 게 편하니까 실체로 쳐주는 거지, 국가가 실체가 어딨어? 세계도 실체 아닌데. 행성은 실체지만 세계가 실체인가? 그러니까 자아가 없는 거면 국가도 없는 걸로 하자 그래!”

수욜이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덧붙였다. 우리 대화는 내내 그런 식이었다. “나나 내 양들은 지구 정부 없으면 여기 못 사는데, 그럼 그게 우리야?”

“야, 지구 정부 없어도 풀만 있으면 살 수 있다며. 그럼 땅이 우리 아니야? 그러니까 지구가?”

“어, 그럼 그 우리는 벌써 망했는데. 지구님은 이제 풀을 충분히 못 만드신다니까.”

나중에, 6분 뒤에, 꼬맹이가 우주 건너에서 끼어들었다.

“화성님은 이끼 하나도 안 만드시는데 그래도 여기서는 우리에 끼워줘요. 일단 여기에는 중력이 있고, 물이나 광물도 있고, 낮과 밤도 있으니까요. 천지창조 2일차쯤 되려나. 이것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래도 국가는 없어요. 도시도 없고. 일상 너머가 곧바로 우주예요. 모래폭풍의 신 같은 건 있지만. 진짜 이런 건 초원이랑 똑같다니깐.”

그러자 수욜이 갑자기 깨달은 듯 단호하게 외쳤다.

“맞아! 나는 꼬맹이 없으면 못 살아! 그리고 너도!”

“나도! 평생 한 번이라도 네 이름을 제대로 불러봤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으면 안 되지.”

“그럼 답 나왔네! 가만, 그런데 답이 뭐였지? 뭐, 여기서부터는 배운 꼬맹이가 잘 정리해봐. 이모들은 화장실 갔다 올 거니까.”

6분 뒤에 꼬맹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직 게르로 돌아오기 전이었는데, 꼬맹이는 벌써 정리를 시작한 듯했다. 그래서 앞부분을 놓치고 말았지만, 꼬맹이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거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될까? 하고 질문하는 방식을 뒤집어보자는 거예요. ‘우리’라는 건 가상의 신을 대체한 가상의 주어여서, 어차피 사람들이 실제로 그런 공동체에서 살아본 적도 딱히 없다면.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이제 누구와 누구를 연결해서 우리라고 부르게 될까? 이렇게. 그러면 국적이 다른 이모들도 둘 다 들어가고, 지구 정부 직원도 들어가잖아요. 다른 행성에 사는 나도. 이런 식으로 연결하고 싶은 사람을 다 넣어서, 그렇게 만들어진 신경망을 우리라고 부르면?”

수욜이 말했다. “사람 말고 염소도 넣어도 되나? 나한테는 가족인데. 지구나 땅이나 풀도? 그럼 날씨도 넣어줘야 하는데. 너는 인공생각도 넣을 거지? 구세계인은 그거 없으면 죽는다며.”

나는 눈알을 위로 굴렸다. “음, 그쪽에서 원한다면. 그런데 원할까? 그래도 꼬맹이한테는 필요할 거야. 화성이니까.”

“그럼 넣자.” 수욜이 재빨리 말했다.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누구와 누구, 그리고 무엇과 무엇을 연결해 우리라고 부를까? 그건 국경도 넘고 행성 사이 심우주도 쉽게 건너뛰는 신경망이었다. 6분의 시차 정도는 우습게 넘어서는 아주 수다스러운 중추신경계.

나는 그 ‘우리’가 되어 곰곰이 생각했다. 일단 지구가 편치 않았으므로, 모두에게 꽤 힘겨운 나날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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