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뮤지컬 창작 60년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2025년 제78회 토니상에서 6관왕(작품상·연출상·각본상·음악상·무대디자인상·의상디자인상)에 올랐습니다. 시작은 서울 대학로의 작은 소극장이었지만 뉴욕 브로드웨이로 건너가 대극장에서 ‘오픈런’으로 해외 관객까지 사로잡은 덕분입니다. 1966년 예그린악단의 ‘살짜기 옵서예’가 우리 뮤지컬 1호로 무대에 오른 지 약 60년 만의 쾌거죠.
오랜 창작과 연희의 전통이 있던 나라이긴 해도 서구식 뮤지컬의 불모지였던 한국에서 이 같은 기적이 어떻게 가능해진 걸까요. 고무신 신고 ‘살짜기 옵서예’를 보러 갔던 시절로부터 연 매출 5000억원 시장에 해외 진출 K뮤지컬이 잇따르기까지 무대 뒤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요.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낸 사람들의 한 편의 뮤지컬 같은 60년 도전사를 만나봅니다.
〈먼저 보실 글〉
⓵ 北 ‘피바다가극단’ 맞서라? 3공 ‘뮤지컬 기동대’ 전설

“한국의 프로듀서라는데, ◯◯◯이라는 사람을 아세요?”
“물론 압니다만…?”
“그 사람들, 모두 도둑놈들이에요. 한국은 WTO(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돼 있는데 무슨 배짱으로 저작권료도 내지 않고 공연을 무대에 올리는 건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요.”
훗날 불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라이선스 계약으로 한국에 들여온 설도윤 프로듀서가 1990년대 중후반 브로드웨이에서 겪은 일이다. 뮤지컬 계약을 타진하러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 일흔 넘은 노익장 프로듀서가 이렇게 벌컥 화를 내더란다. “너무 부끄러워 찻잔 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헤이, 미스터 프로듀서』 설도윤 지음, 다할미디어, 2011)
비슷한 회고를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예술감독도 털어놨다. 뮤지컬 ‘더 라이프’ 저작권 계약을 하기 위해 일본의 대행사 대표와 만났는데 대뜸 이러더란다.
“한국은 단 한 차례도 정식 라이선스 계약을 맺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브로드웨이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현지에서 공연되고 있는 작품을 도용했다면 바로 소송이라도 했겠지만, 구닥다리 레퍼토리만 무대에 올려서 그러지 않았던 겁니다. 계약은 곤란합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던 박 감독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이렇게 답했다.
“도둑질할 사람이 왜 대낮에 집주인에게 찾아오겠습니까? 여태까지 한국이 한 일은 신뢰를 잃어 마땅합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대로 내버려둘 겁니까? 이번 건으로 한국에서도 정식 계약을 맺는 풍토가 조성될 겁니다.”(『드림 프로듀서』 박명성 지음, 북하우스, 2019)
요즘 K드라마, K무비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한국 콘텐트 제작사들이 불법 복제물 유통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이야말로 ‘해적판 천국’이었다. 한국이 세계저작권협약(UCC: 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에 가입한 건 1987년, 실천에 나선 건 1995년 WTO 체제 출범 후 저작권법을 개정하면서다(‘1996년 개정 저작권법’ 시행). 그때까진 국내 공연업계에서 해외 인기 작품의 대본과 악보를 입수해 제멋대로 무대에 올렸다. 1996년 ‘브로드웨이 42번가’가 처음으로 정식 계약에 따라 러닝 로열티를 지급한 라이선스 공연으로 기록된다.
지금도 연극만 가지고는 밥을 못 먹습니다. 직업화를 하려면 끊임없이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움직여서 (수익을) 창출해야 되잖아요. 생산을 해야 그게 팔리고 소비자들이 소비할 텐데… (중략) 그땐 경영이라는 게 없었어요. 자본이 제대로 투입도 안 되고, 극장도 없었어. 캐퍼(규모)가 작단 말이에요. 극단도 그렇고, 재정도…. (표재순, 전 현대극장 연출가, 2024 서울시뮤지컬단 갈라 콘서트 인터뷰 중)
저작권 개념이 자리잡고 그에 걸맞은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선 일단 ‘시장’이 커져야 했다. 1966년 예그린악단의 ‘살짜기 옵서예’가 국내 창작 뮤지컬 1호로 호평받긴 했지만 국가적 지원이 뒷받침된 덕분이었다. 민간 뮤지컬 창작자·배우는 물론 제대로 된 공연장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연극계에서 뮤지컬 장르를 낮춰 보는 풍토 또한 강했다.
이 같은 흐름을 바꾸기 위해선 판도를 뒤집을 ‘한방’이 필요했다. 그 신호탄을 쏘아올린 게 극단 현대극장의 뮤지컬 ‘빠담빠담빠담’(1977)이다. 프랑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1915∼63)의 일생을 그린 이 작품의 주연은 가수 겸 배우 윤복희(당시 31세)가 맡았다.
한국 뮤지컬의 전설…시대를 앞서간 가수 윤복희

1946년 서울 출생. 일본 도쿄에서 성악을 공부한 아버지 윤부길(1912~57)을 따라 어릴 적부터 비상한 무대 기질을 보였다. 52년 아버지가 만든 가무극 ‘크리스마스 선물’을 통해 뮤지컬 배우로 데뷔했다. 아홉 살 때 오디션을 거쳐 미8군 쇼 무대에 올랐고, 63년 워커힐극장 개관 공연으로 내한한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1901~71)의 눈에 띄어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렸다. 그해 영국 BBC 투나잇쇼에 여성 4인조 ‘코리아 키튼즈’로 전파를 탔다. 이후 미국 라스베이거스 쇼 가수로 활동하던 중 내한, 국내 ‘미니스커트 열풍’의 원조가 됐다. 77년 뮤지컬 ‘빠담빠담빠담’을 시작으로 숱한 작품에 출연해 국내 뮤지컬계의 대모 같은 존재다. 가수 데뷔곡은 67년 ‘웃는 얼굴 다정해도’. 79년 제3회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여러분’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2023년 제7회 한국뮤지컬어워즈 공로상을 수상했다.
1977년 5월 19일부터 23일까지 이화여고 강당인 유관순기념관(1974년 완공)에서 초연됐다. 닷새간 10회 공연에 총 1만4000명이 몰렸고, 곧바로 재연·삼연이 잇따랐다. 하지만 일각에선 “유행과 시류에 아부하는 간교한 상업 근성”(연극평론가 이태주, ‘77년 상반기 공연’ 시평 중에서)이라는 혹평이 나왔다. 내로라하는 평론가들이 너나없이 ‘빠담…’ 논쟁에 뛰어들었다. 누가 뭐래도 그해 가장 뜨거운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