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국판 5·18’ 켄트주립대 학살

2025-08-22

“탕탕탕~” 1970년 5월 4월 12시 반, 미국 오하이오주 방위군 100여명은 오하이오주 켄트시에 있는 켄트주립대학 언덕 위에서 시위대에게 M-1 소총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60여발을 발사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을 향한 이들의 발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4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한 것은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만이 아니다. 사망자에는 구경하던 학생, 수업에 가던 학생도 있었다. 전두환 일당이 시민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를 낳은 ‘광주학살’ 10년 전에 ‘미국판 5·18’이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에서, 그것도 학문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 안에서 벌어진 것이다.

미국 북부 5대호 중 하나인 이리호 남쪽에는 ‘로큰롤의 발생지’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이 있는 클리블랜드가 자리 잡고 있다. 클리블랜드에서 남쪽으로 60여㎞를 달려가자, 문제의 켄트주립대학이 나타났다. 제일 먼저 학생회관 앞 운동장을 찾았다. 주방위군이 운동장에 모여 있던 베트남전쟁 반대 집회 참가자들에게 해산을 명령하면서 비극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운동장 옆에는 커다란 돌로 만든 ‘5·4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그 뒤에 세워진 한 건물로 사람들이 심심치 않게 들어가고 있었다. 비극적 사건을 추모하는 ‘5·4 기념관’이다.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켄트주립대학 학살’ 현장에 서자,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에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주방위군, 반전 시위대에 총격 13명 사상

닉슨은 1968년 대선에서 베트남전쟁을 끝내겠다고 약속, 대통령에 당선됐다. 취임 후 그는 베트남전쟁을 축소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말, 오히려 캄보디아를 공습하며 전쟁을 확대했다. 4월 30일, 닉슨은 전국에 생중계된 기자회견을 통해 캄보디아 공습은 북베트남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요일인 5월 1일, 전국 대학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학생회관 앞에서 열린 켄트주립대학 집회에서 학생들은 “미국 헌법이 죽었다”며 헌법 책을 땅에 묻는 헌법 장례식을 치른 뒤, 주말을 지내고 4일 다시 모이기로 했다. 학생들은 시위 뒤 켄트 시내에 나가 ‘불금’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들과 경찰이 충돌했다. 화가 난 학생들이 경찰차에 술병을 던졌다. 시장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모든 술집의 문을 닫게 했다. 이는 불난 집에 휘발유를 부은 것으로, 시위대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결국 최루탄을 발사하고서야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시위대가 과격해지는 것을 우려한 시장은 다음날 오하이오주지사에게 주방위군 파견을 요청했다. 2일 주방위군이 대학에 진주했고, 주말이지만 학교에 나온 학생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군인들이 점령한 것에 놀라 이에 저항했다. 그 과정에서 목조건물인 학생군사교육단(ROTC) 건물이 전소했는데, 그 원인은 이후 조사에서도 밝혀지지 않았다.

4일 대학 당국은 모든 집회를 금지한다고 공지했지만, 학생회관 앞에는 주말에 예고한 대로 구경꾼을 포함해 3000여명의 학생이 모였다. 주방위군은 해산을 명령했지만, 학생들은 이를 무시했다. 주방위군은 최루탄을 발사했고, 학생들은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몇 번의 공방 끝에 수적으로 열세인 주방위군이 언덕 쪽으로 후퇴했다. 지형상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주방위군은 학생들을 향해 13초간 67발을 발사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더 이상의 참사를 막은 것이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대학경찰 책임자가 분노한 학생들에게 주방위군과 충돌할 경우 학생들만 희생당할 뿐이라고 20여분간 눈물로 설득해 학생들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켄트주립대학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난리가 났다. 특히 전국 대학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전국 대학은 휴교해야 했다. 닉슨이 임명한 대학소요 대통령특별위원회는 조사 결과 주방위군의 사격은 “불필요하고 변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판정했다. 미국 정부는 현장을 지휘했던 10명의 장교와 100여명의 병사를 기소했다. 하지만 배심원들은 당시 시위대에 포위된 방위군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총격을 가한 것이라며 정당방위로 이들을 불기소처분했고, 민사소송에서 사상자들에게 70만달러를 보상한 것에 그쳤다.

‘분열’이 잉태한 비극은 오래된 미래일 수도

이 사건의 영향과 역사적 의미는 엄청나다. 이 비극은 일반 국민에게 반전 여론을 확대시켜 베트남전쟁의 종전을 앞당겼고, 닉슨 정부의 몰락을 가져왔다. 아니, 이를 넘어서 이 사건은 ‘미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이 사건을 연구한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5·4 학살은 “순진한 학생들, 정치적으로 야심 많은 주지사,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대학 당국, 그리고 주방위군의 한심한 리더십이 합쳐져 벌어진 비극”이지만 “전쟁 무기를 자기 나라의 청년들에게 겨눈 역사적 사건이자 ‘미국적 순진함(American Innocence)의 종말’이었다”. 아니다. 원주민 학살, 아프리카계 노예 등이 보여주듯이, 미국은 켄트주립대학 학살 이전에도 절대 순진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 ‘미국적 순진함이라는 착각의 종말’이었다.

5·4 기념관 전시물을 보던 중 무언가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켄트 비극의 배경인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미국을 묘사한 제목이었다. ‘분열된 나라(Divided Nation).’ 그렇다. 위에서 논의된 것들은 비극의 직접적인 사건사적인 원인일 뿐, 5·4 비극을 잉태한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의 보수적인 백인 상류층 지배체제, 그리고 이에 저항해 1960년대 폭발한 아프리카계의 민권운동과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히피라는 대항문화운동, 반전운동의 ‘대분열’이다. 위대한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가 징집을 거부하고 한 명연설이 이를 대변한다. “루이빌의 소위 니그로들이 개처럼 취급당하고 간단한 인권조차 거부당하고 있는데, 왜 나에게 군복을 입고 1만마일 떨어진 베트남에 가서 자신들의 정의와 자유, 평등을 위해 싸우는 유색인들에게 폭탄을 떨어뜨리고 총을 쏘라고 하는가?” 백인의 경우도 기득권층 자녀들은 주방위군 등으로 빠지고 힘없고 ‘백없는’ 자식들만 베트남에서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학생들은 분노했다.

문제는 ‘분열된 나라’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는 점이다. 트럼프를 비롯해 세계 주요 국가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극우 포퓰리즘이 잘 보여주듯이 미국은, 아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태극기부대’와 ‘개딸’ 등이 잘 보여주듯이, 우리 역시 ‘분열된 나라’다. 켄트주립대학을 떠나며 나는 태극기부대와 개딸을 생각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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