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박정희] (10) 소년 박정희-2편…왕복 40리 등하굣길이 강인한 체력·정신력 ‘밑거름’

2024-10-24

어머니는 큰 빚 진 듯 늦둥이 애지중지

큰 누나 젖도 먹고 형제 사랑 듬뿍 받아

여름 장맛비·겨울 눈길에 학교 못 가기도

힘들고 아름다운길 오가며 ‘새 길’ 꿈꿔

존경했던 형 日 순사 탄압 받아 복수심

“사람이 길을…” 말에 개척자 정신 싹터

◇ 가난했지만 사랑받았던 아동기

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언제나 정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희를 임신했을 때 온갖 방법으로 아기를 지우려 했던 것을 평생 죄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정희에게 다른 자식보다 더 애처로움과 연민을 느꼈고, 정희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깊고 자상한 모정이었다.

정희의 어머니 백남의는 남편 박성빈과 부부 사이가 좋았다. 박성빈은 한량 기질에 가사에 무관심하였으나 백남의는 가사를 도맡아 하는 알뜰한 인물이었다. 백남의에 대한 상모리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은 ‘자존감이 대단한 여자’이고 ‘독하면서 자상하고 가냘픈 여자’였다. 남편에 대해 불평 한마디를 남긴 흔적이 없고 가난 속에서도 동그란 돋보기를 쓰고서 언문 소설을 즐겨 읽곤 했던 인물이다. 부부는 서로 다른 성격이었으나 백남의의 온화한 성품으로 충돌하지 않고 화목했었다.

정희의 아동기 시절, 아버지 박성빈은 한량 기질과 가사에 무관심하였으나 막내 정희에게는 애틋했다. 나이로 아버지뻘 되는 큰 형 동희는 만주에 있었고, 둘째 형 무희는 결혼하여 이웃에서 살고 있었다. 큰 누나 귀희는 결혼해서 딸을 낳고는 가끔 친정에 와서 젖이 안 나오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막내 동생 정희에게 젖을 물려 주었고, 셋째 형 상희, 넷째 형 한생, 작은 누나 재희 모두 정희를 귀여워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형제자매들은 부모 특히 어머니의 사랑을 두고 경쟁한다. 그러나 정희의 형제들은 워낙 늦둥이였던 정희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정희 형제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막내 정희에게 빼앗긴다는 형제간 경쟁(sibling rivalry) 심리로 인한 정희에 대한 미움은 없었다. 형제간 경쟁 심리는 나이 차가 적고 남자 형제일수록 심한 경향이 있다. 정희의 형들은 나이 차가 크고 바로 위 재희도 나이 차가 5살 이었고 누나였다. 아마 이러한 정신의학적 배경들이 정희의 형제들이 형제간 경쟁 심리없이 정희를 귀여워해주고 관심과 사랑을 주는데 한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희가 구미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어머니 백남의의 정희에 대한 돌봄 이야기이다.

구미보통학교를 다니는 정희만큼 고생을 한 사람이 그의 어머니 백남의이다. 시계도 없이 새벽 창살을 보고 일어나서 새벽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다음에 정희를 깨운다. 겨울에 추울 때는 세숫대야에 더운물을 방안에까지 들고 와서 아직 잠도 덜 깬 정희를 세수시켜주고 밥을 먹여준다.

정희가 아침 밥을 먹고 있으면 같은 동네의 같은 학교의 두 명의 친구들이 삽작(‘대문’ 또는 ‘문’을 뜻하는 경상도 사투리) 곁에 와서 학교 가자고 부른다. (정희와 함께 학교에 다니던 친구 두 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자퇴한다) 그의 어머니는 그 애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구둘목에 앉히고 손발을 녹이도록 권한다. 밥을 먹고 채비를 차리고 나면 셋이 새벽길을 떠난다. 아직 이웃 집에 사는 사람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새벽길을 얼어붙은 시골길을 미끄러지면서 뛰어간다.

정희가 뒤를 돌아보면 청녕둑(집 앞에 있는 산이름) 소나무 사이에 우리들을 보내놓고 애처로워서 지켜보고 서 계시는 어머니의 흰 옷 입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시간인데 늦을 때는 동네 어귀 훨씬 밖에까지 형들과 같이 나와서 ‘정희 오느냐’, ”정희야“하고 부르면 정희는 ”여기 가요‘하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왜 좀 일찍 오지 이렇게 늦느냐”하며 걱정을 하면서 그의 어머니는 자기가 두르고 온 목도리를 정희에게 둘러 준다. 정희는 뛰어왔기 때문에 땀이 나서 춥지도 않은데 어머니가 자꾸만 목에다 둘러 주시는 것이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구둘목 이불 밑에 정희의 밥그릇을 따뜻하게 넣어두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그의 어머니는 상머리에 앉아서 정희를 지켜보았다. 신고 온 버선을 벗어보면 흙투성이다. 어머니는 밤에 버선을 빨아서 구둘목 이불 밑에 넣어서 말린다. 내일 아침에 또 신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얼었다가 저녁을 먹고 온돌방에 앉으면 정희는 갑자기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숙제를 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어버린다. 어머니가 억지로 정희를 깨워서 소변을 보게 하고 옷을 벗겨서 그대로 재우면 정희는 곤드레가 되어 떨어져 자버리곤 한다.

어느 날 정희가 학교에서 돌아와 막 사립(사립짝을 달아서 만든 문)을 들어서자, 부엌에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어머니는 부뚜막에 앉아 아주 맛있게 무언가를 먹고 계셨다. 어머니가 정희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이제 오느냐, 배고프지 어서 와서 이것 좀 먹어 볼테냐?, 어머니, 그게 뭐예요?, 보면 모르느냐?, 비름나물 비빈거란다. 어머니가 들기름으로 비벼주는 비름나물 비빔밥은 기막히게 고소하고 맛깔스러웠다. 어머니는 바가지에 보리밥을 담고 비름나물을 섞고 고추장과 들기름을 넣어서 수저로 싹싹 비벼 한 입을 떠서는 정희의 입안 가득 넣어주었다. 정희에게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비름나무 비빔밥은 배고픔을 채우는 것을 넘어 어머니의 사랑을 채웠으리라. 훗날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비벼주던 비름나물 비빔밥의 기억을 잊지 못해 육영수 여사에게 부탁하여 비름나무를 사다가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시장에서 비름나물을 팔지 않자 청와대 뒷동산에 작은 밭을 일구어 심었다. 가난했으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데는 비름나물 비빔밥이 최고였다.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 저녁을 먹고 나면 가족들은 군불을 때서 따뜻한 방안에 함께 모인다.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다. 밤이 늦어지면 이야기도 한물가고 모두들 밤참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양은그릇에 홍시나 곶감을 담아 들고 올 때도 있고, 때로는 저녁에 먹다 남은 밥에다가 땅에 묻어둔 배추김치를 가져와서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 밥에 걸쳐서 먹기도 한다. 이것이 정희가 보낸 어린 시절 상모리에서의 겨울밤 풍경이다.

정희는 비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마음까지는 가난하지 않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은 막내 정희를 사랑했다.

아동기에 필요한 가정환경은 부모님의 사랑 특히 어머니의 사랑, 부모의 원만한 부부관계, 부모님 이외의 형제자매간의 관심이다. 부모님괴 형제들 특히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귀여움을 듬뿍 받고 자란 정희였다. 아동기의 이런 가정환경은 건전한 인성 발달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특히 어머니의 아동기 때 사랑은 정희가 성장하며 숱한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 한 용기와 의지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사랑이 용기로 전환되는 이 공식이 정희에게도 정확히 적용되었다. “영웅을 만드는 것은 훌륭한 어머니다”는 법칙은 정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몰래 눈물을 자주 흘렸고, 국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국민을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은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덕분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성심성의를 다해 선정에 힘써서 보다 부강하고 자랑스러운 조국을 건설하여 후세에게 물려주는 일, 이것이 어머님 사랑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 촌놈 정희와 아이스크림

정희는 어린 시절 상모리 마을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촌놈이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같은 세련된 군것질을 해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셋째 상희 형과 함께 김천 시내를 걷고 있었다. 마침 아이스크림 장수가 외쳤다. “아이스크림 사려! 아이스크림!” 상희 형이 호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선뜻 정희의 손에 쥐어주었다. 정희는 난생 처음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다. 고깔같이 생긴 컵에 담아주는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자 시원하게 사르르 녹았다.

그런데 상희 형은 아이스크림 먹을 틈도 주지 않고 자꾸만 앞서 걸어갔다. 형을 따라 가려고 빨리 먹다가 그만 아이스크림 컵을 놓치고 말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컵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정희는 울상이 되어서 저만치 앞서가는 상희 형을 큰 소리로 불렀다. 정희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으면 그 그릇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줄만 알았기 때문이다.

”형! 이것이 깨어졌어요. 물어주어야겠어요!“ 당황하며 눈이 동그래지며 울상을 짓는 정희에게 아이스크림 주인은 그 그릇도 같이 먹는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며 환하게 웃는다. 그제야 정희는 안심을 하고 환하게 웃는다. 그 날 저녁 상희 형과 형수는 정희를 촌놈이라고 놀려댔다. 그 후로도 가끔씩 식구들은 이 일을 기억하고 정희를 촌놈이라고 놀리곤 했다.

박상희는 정희와 함께 형제 중 유이하게 보통학교를 나왔다. 박상희는 정희보다 12살 위로 정희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단순히 형제 관계라서가 아니라 정희가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박상희도 정희를 어렸을 적부터 잘 보살피고 아꼈다고 한다.

박상희는 20대 초반일 때 신간회의 경북 선산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27년 8월 30일 자 <조선일보> 기사 ‘경북 선산에 신간 준비’는 7월 26일 오후 4시 구미 금창여관 2층에서 신간회 선산지회 설립준비위원회 모임이 있었다면서 준비위원 10명 중 하나로 박상희를 거명했다. 9월 2일의 준비위원회 제2차 회의를 보도한 그해 9월 5일 자 기사는 구미 김원용 자택에서 열린 이 회합 때 ‘박상희 씨의 경과보고’가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과 보고자로 나설 만큼, 준비위원회 결성 과정에 초기부터 적극 개입했던 것이다. 그의 경과보고 뒤에 이재기 의장 주재로 6개 항이 토의됐다. 그중 다섯 번째는 장인달·김수호와 더불어 박상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하는 안건이었다. 국내 최대 민족운동단체의 선산지부 3인 상무위원 중 한명으로 뽑혔으니, 20대 초반의 박상희가 지역유지급 대우를 받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 해에 정희는 열 살이었다.

박상희는 신간회 탄압 때 구속되기도 했으며 예비검속이 있을 때마다 며칠씩 구금되기도 했다. 박상희의 집에는 비밀리에 신간회 회원들이 드나들었고, 그들은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행동했다. 박상희로 인해 집안엔 근심의 먹구름이 끼고, 혹 그가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는 날이면 식구들은 며칠씩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지기 일쑤였다.

형을 존경했던 정희는 어서 커서 형을 괴롭히는 자들을 혼내주겠다는 복수심에 사로잡히곤 했다. 정희는 일제를 향한 비분강개로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정희의 가슴속에 어느새 민족의식이 남모르게 싹트고 있었던 시기는 형 박상희가 일본 경찰의 탄압을 받는 것을 목격한 보통학교 저학년 때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구미보통학교, 20리 길의 등하굣길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백남의는 셋째 아들 상희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켰다. 그 당시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 하나 뿐이었다. 그리고 정희 나이 9살 되던 해 막내 아들 정희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상희는 벌써 졸업을 했다. 상희와 정희는 집안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은 유이한 2명이었다. 이 때 정희 마을에서는 세 아이가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다른 두 아이는 정희보다 몇 살 위였다.

아홉 살 되던 해인 1926년 정희는 당시 구미면 내 유일한 공립 초등교육기관인 구미보통학교(현재 구미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네 살 때부터 다녔던 서당에서 천자문, 사자소학을 끝낸 뒤였다. 보통학교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서당과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학교 건물과 수 많은 학생들, 머리를 짧게 깎은 교사들의 모습, 줄을 맞춰 걷는 절도 있는 행진은 지금까지 그가 보았던 곳과 다른 세상이었다. 정희에게 학교는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진 길이었다.

정희의 집 상모리에서 구미읍에 있는 구미보통학교까지는 약 8Km, 20리 길이었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닿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시계를 가진 사람이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가다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 우편 배달부를 시계로 삼았다.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를 짐작으로 시간을 판단했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시계로 삼았다. 철길이 학교가 있는 구미읍내를 거쳐 북쪽으로 뻗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차와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이 늦고 빠르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표가 변경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시간이 좀 늦다고 생각되면 구보로 20리 길을 거의 뛰어야 했다.

작은 키에 몸도 여위었고 얼굴도 뙤약볕에 까맣게 그을렸다. 성년이 된 뒤에도 체구가 작고 깡말랐고 피부가 검은 편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기찻길 옆으로 난 오솔길로 등하교하며 소년 정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렸다. “저 기찻길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군인과 무기를 실어 나른다.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더 멀리 길을 내고, 길은 다시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른다.”

정희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저 기찻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길을 내고, 길이 사람을 실어 나른다.” 그가 학교와 집을 오가며 걷는 오솔길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여기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먼저 걷고, 그 뒤를 따라 또 많은 사람이 걷고, 그리하여 마침내 길이 생겼다. 지금 내가 편히 이 길을 걷는 것은 누군가 풀과 자갈로 덮여 있던 거친 들판을 반질반질하게 닦아 주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에 길을 내고, 뒤에 올 수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고,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이때 싹튼 소년 정희의 ‘개척자 정신’은 훗날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소 건설, 새마을 운동, 산림녹화 사업, 쌀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과 군 현대화, 철강·자동차·중화학·조선·전자·반도체산업 육성등 공업화의 길을 열었다.

훗날 박정희는 자신의 ‘등하굣길’을 이렇게 회고했다. “여름과 겨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름에 장맛비가 내리면 책보를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도롱이(짚, 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를 두르고 삿갓을 쓰고 학교에 간다. 아랫도리 바지는 허벅지까지 둥둥 걷어 올렸는데도 비가 들이쳐 흠씬 젖는다. 흙탕길을 걸으면 물이 튀어 바지가 온통 흙탕이 된다. 학교에 닿을 즈음이면, 책보 속의 책들은 이미 빗물에 푹 젖어버린다. 집에 돌아와 버선을 벗으면 버선은 온통 흙투성이에 물 자루이다.”

“겨울에는 단단히 채비를 하고 학교를 오가야 한다. 솜바지 저고리에 솜버선을 신고 두루마기를 입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눈만 빠꼼하게 내놓고 간다. 간밤에 내린 눈더미에 땅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진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면 앞을 분간할 수 조차 없다. 눈 쌓인 시골 논두렁길을 가다가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기를 수없이 한다.” “집으로 오는 중간에 솔밭길이 있다. 잘 자란 소나무가 우거진 솔숲에선 가끔 늑대가 나온다. 혼자서는 나다니기 위험한 지대였다. 어느 눈보라가 치는 날 아침 이곳을 지나다가 눈 위에서 늑대 두 마리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되돌아 와버려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그곳을 지날 때는 언제든지 늑대가 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눈이 동그랗게 되어서 앞만 보고 빨리빨리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봄가을 등하굣길은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산길 들길에 새 풀이 나고,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새움이 돋으면 기뻐 어쩔 줄 몰라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뿐사뿐 산길 들길을 오간다. 산들 내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이다. 자비와 평등과 박해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가슴 가득 채워진다. 진달래가 핀 산길을 따라 가다가 한 가지씩 꺾어 꽃잎을 따서 입에 넣으면 배고픔도 수그러든다. 칡뿌리를 잘라서 질겅질겅 씹으며 걷기도 하고, 싱아를 꺾어서 신맛을 즐기기도 한다. 먼 뻐꾸기 소리, 높이 날며 지지배배 노래를 흘리는 종다리들, 봄길 아지랑이 동무들과 함께 종알거리며 집으로 오는 길은 정말 흥미진진하고 즐거움이다. 가을이면 억새 풀밭을 따라 집으로 온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옷 속으로 스미고, 그 가락에 맞추어 가녀린 억새들이 사륵사륵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산모퉁이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감국이 지천으로 피어서 꽃송이를 꺾다 보면 어느새 날이 어두워서 숨을 몰아쉬며 집을 향해 내달린다.”

소년 정희가 상모리 집에서 구미읍 학교까지 가는 등굣길은 어린 소년이 걸어 다니기에는 힘겨운 길이었다. 그러나 정희에게는 등굣길의 힘겨움은 고통이 아니었으리라.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던 꿈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등굣길은 더 큰 자기를 담을 수 있는 기회였고, 그 과정에서 그는 더욱 성장하였으리라.

박정희의 힘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집착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은 힘이다. 성공에 대한 집착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또한 실패를 두려워하게 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의 힘’,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박정희의 힘이다. 더 나아가 박정희는 안전한 길은 죽은 자의 길이라 생각했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면 절대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장 하기 싫은 일, 가장 어려워하는 일,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해야 할 일은 목숨 걸고라도 기꺼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시 시련과 좌절의 시대적 배경을 상징하는 이 힘겨운 길이 훗날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 어려움을 극복하는 박정희의 힘이 되었고, 오직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의 신념은 실행에 옮겨졌으리라.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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