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선배가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겠다 해서 작업실에 놀러 갔다. 이탈리아산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는데,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정성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뜨겁게 데운 에스프레소 전용 잔에 사탕수수 원당 한 알을 넣고 에스프레소 진액을 담은 후 뜨거운 우유 조금, 올리브유 한두 방울을 넣어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 완벽한 음향시설까지 갖춰 놓았기에 오감이 행복해지는 곳이었다.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던 선배가 마지막 곡이라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소월의 ‘첫 치마’가 프린트된 종이였다. 성악가 조수미가 이 시를 노래한 곡이라 했다.
“첫 치마는 옛날 말로, 시집간 여자가 부엌에 처음 들어갈 때 입는 치마를 말한대요. 보통 친정어머니가 만들어 준다지요.”
이야기를 듣고 시를 읽으니 더 슬퍼졌다. 그냥 슬픈 게 아니라 흐느끼는 “집난 이”가 된 것처럼 슬펐다. 봄은 가나니, 꽃은 지나니, 속없이 우나니, 속없이 느끼나니-. 우리말을 두 손으로 빚어내듯 표현하는 소월의 솜씨도 놀랍지만 본가를 떠난 신부를 “집난 이”라 칭하는 말도 서늘하다. 집을 나간 이라니. 왜 옛날엔 여자를 두고 시집으로 ‘간다’ 했을까? 새 삶을 꾸리는 건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인데.
젊고 새로운 시를 칭송하는 시대라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시 앞에서 무너진다. 누구 앞에서도 무너지지 말자, 마음을 여미던 시간이 무색하도록. 커피도 음악도 좋았지만 이날 나는 ‘첫 치마’ 한 장에 무릎이 꺾였다.
시인 박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