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 협상 타결은 한국의 안보와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을 해소했다. 양국 모두 타협 이외 다른 선택지를 고려하기에는 잠재적 위험이 너무 컸다. 그러나 가장 큰 불확실성은 아직 남아 있다. 바로 미국의 미래다. 특히 관세 협상 타결로 한국의 경제와 안보가 미국과 더 긴밀히 엮임에 따라 미국의 미래는 바로 한국의 앞날과 직결된다. 미국 경제가 회복돼 중국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을까. 반대로 더 빨리 쇠퇴하는 길로 접어들진 않을까.
트럼프 임기 말의 경제 성적표에
정부부채 감소는 일부 성과 예상
첨단제조업 재건은 성공 불확실
불평등 악화가 미국 미래의 관건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라는 수단으로 그동안 미국을 옭아매던 정부부채 증가에 제동을 걸고 있다. 정부부채는 미국이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다. 국내총소득의 120%를 상회하는 부채로 인해 미국 정부는 국방비보다 더 많은 돈을 이자 상환에 써야 한다. 이대로 가면 정부의 손이 묶여 대내적 혼란은 물론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도 밀리게 된다. 재정적자를 줄이려면 증세와 정부 지출 감소가 원칙이지만 이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독배를 피하는 기발한 방안을 찾았다. 타국에 양자 관세를 부과해 벌어들인 돈으로 재정적자를 메운다는 발상이다. 이를 위해 세계 통상 질서의 근간이었던 다자주의 원칙마저 무너뜨렸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말 국민총소득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소폭 떨어질 전망이다. 관세 수입은 재정적자를 줄여 정부부채를 감소시킨다. 그러나 감세와 정부 지출 증가를 기조로 하는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이 발효됨에 따라 늘어나는 재정적자는 관세 수입 효과를 상쇄한다. 따라서 부채 총액에는 큰 변화가 없겠지만, 경제성장으로 국민총소득이 커지면서 부채 비율은 2025년 말 125%에서 임기 말에는 110% 후반대로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관세 부담은 미국에도 돌아간다. 관세 인상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그 결과 외국의 수출 기업뿐 아니라 미국 수입업체와 소비자도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국민을 대상으로 명시적 세금 인상 대신 관세라는 은밀한 세금을 매겼다. 더욱이 관세는 역진적이어서 저소득자에 더 큰 부담을 준다.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소득 불평등이다. 현재 미국의 지니계수는 세전 소득 기준 0.49로서 20세기 초 이래 최고 수준이다. 1970년대의 0.4보다 0.09 포인트나 높으며 미국 대공황이 발발했던 때와 유사한 수준이다. 일부 경제학자는 높은 불평등이 전쟁이나 경제 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을 경고한다. 소득 불평등은 정치 양극화와 결합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관세뿐 아니라 ‘OBBBA’도 소득 불평등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예일대의 예산연구소(Budget Lap)에 따르면, 관세와 ‘OBBBA’의 복합 효과로 소득 하위 10%의 가계소득은 7% 감소하는 반면, 상위 10%의 가계소득은 1.5% 증가한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 내 첨단제조업 재건에 큰 희망을 걸고 있다. 첨단제조업을 부흥시켜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고 중산층을 복원하면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리라고 기대한다. 또 미국의 최대 취약점인 첨단제조업 생태계를 국내에 형성할 수 있다면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것으로 믿는다. 국내 자본의 동원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관세를 무기로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첨단제조업 중흥의 마중물로 삼으려 한다.
미국이 첨단제조업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거대한 장벽을 극복해야 한다. 첫째는 인력 문제다. 2024년에 미국의 국민총생산 대비 고정자본형성(투자) 비율은 21.7%였다. 미국과의 관세 협정에 따른 한국과 일본 정부의 투자에다 국외 기업 투자까지 가세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재임 기간 투자 비율은 23% 내외로 증가해 1960년 이후 최고 수준의 투자 붐이 일어날 전망이다. 그러나 미국의 현재 실업률은 4.3%로 완전고용 실업률로 추정되는 4.1%와 별 차이가 없다. 게다가 트럼프 정부는 반(反)이민 정책을 펴고 있다. 그 결과 인력 부족과 이로 인한 인건비 상승이 첨단제조업 구축을 가로막을 수 있다. 둘째는 문화의 문제다. 창의성을 강조하는 미국 교육과 사회규범은 제조업보다 세계 최첨단의 기술개발과 서비스업에 유리하다. 현재 첨단제조업이 대부분 동아시아에 밀집한 이유도 문화와 교육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어떻게 단기간에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이 장기적으로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될까.
이상의 전망은 미국이 급속히 쇠퇴하리라는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뚜렷한 회복도 힘들 듯하다. 정책의 목표는 분명하지만 수단 간 정합성이 낮다. 특히 소득 불평등과 정치 양극화 심화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가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의 패권 경쟁은 비틀거리는 두 거인이 다투는 형국이다. 그 승패는 첨단 기술개발보다 어느 쪽이 대내외 압력에 더 잘 견디는지에 따라 판가름 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병연 서울대 석좌교수·경제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