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한 달 바캉스’는 생존의 문제…잘 쉬어야 버티니까

2025-08-16

묘하다. 유럽에 살면 일 년에 새해를 두 번 맞이하는 느낌이랄까. 한국의 시간은 1월에 시작해 12월에 끝나는 자연스러운 사이클을 따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사계절 리듬 속에서 살아가며 시작과 끝, 쉼과 출발이 한 흐름 속에 있으니 특별히 복잡할 것도 없다.

유럽은 다르다. 특히 벨기에의 교육제도는 9월에 시작해 6월에 끝나는 독특한 타임라인을 따른다. 새로운 시작은 가을에 찾아오고, 졸업과 방학은 여름에 맞이한다. 그래서 여름이 끝나면 불현듯 한 해가 반으로 잘린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달력을 나란히 놓고 사니 때로는 몸과 마음에 시차 적응이 필요하다. 여행에만 시차가 있는 게 아니다.

매년 여름이 다가오면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한 달이나 휴가를 간다고?”라며 놀라워하곤 한다. 그들의 말속에서 놀람과 부러움이 동시에 묻어나지만, 사실 긴 여름 휴가는 단순히 부러워할 만한 일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어찌 보면 처절한 생존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날씨다. 유럽, 특히 벨기에의 여름은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쾌청한 하늘에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맑은 구름.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름 한 철을 제외하면 나머지 계절의 날씨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벨기에는 구름과 비가 끊임없이 하늘을 덮고, 특히 긴 겨울은 그야말로 ‘어둠의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낮은 짧고, 추우며, 온종일 칙칙한 회색빛이다. 햇빛이 비치면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얼굴을 들이미는 이곳 사람들. 날씨가 좋을 땐 그 짧은 순간이라도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이 광경이 이제는 그저 웃기지도, 이상하지도 않다. 나 역시 그러니까. 기나긴 겨울을 견뎌내려는 본능, 절박한 마음의 발로일 테다.

두 번째 이유는 ‘생활의 피로도’다. 한국에서 너무도 당연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아니, 아예 없거나 적어도 쉽게 기대할 수 없다. 병원 예약은 필수이고, 배달 음식은 도심이 아니면 어려우며, 동네 가게들은 저녁이 되기 무섭게 문을 닫는다. 유럽의 생활은 일상의 편리함은커녕, ‘불편한 단조로움’에 가깝다. 삶을 버틴다는 표현이 때로는 지나치지 않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묵묵히 이를 견디며 긴 휴가를 통해 자신을 ‘리셋’한다. 곧 좋아질 날씨를 기다리며, 모든 걸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를 그 시간을 그려보며.

‘바캉스(vacance)’는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어원은 라틴어 ‘vacatio’이다. ‘비어 있음’ 혹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이들에게 바캉스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부족하고 불편한 삶에서 잠시 ‘로그아웃’하는 시간에 가깝다. 그리고 1년을 버티기 위한 심리적·육체적 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 역시 올해는 햇살이 조금 더 오래 머무는 남쪽, 슬로베니아로 떠난다. 짐을 싸는 이 순간, ‘바캉스’란 말이 왜 이리 비장하게 느껴지는지. 물론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지친 일상으로부터 나를 잠시 분리하고, 다가올 회색빛 시간을 버티기 위한 1년치 심리적 면역력을 쌓으려는 의도가 더 크다. 바캉스는 무언가를 끊어내는 휴식이라기보다, 지친 일상과 나를 다시 잇는 조용한 매듭 같다. 때론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울 만큼 버거울 때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끈, 마치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 속에 절박한 순간 하늘에서 내려온 하얀 동아줄 같기도 하면서.

문득 생각한다. 만약 다음 생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삶을 고를까? 햇살이 가득하고 일상이 편리한 한국에서의 삶, 혹은 긴 바캉스 한 방으로 1년을 버티는 유럽식 삶 사이에서. 정답은 이미 마음 한구석에 있을지 몰라도, 일단은 고민하는 척, 고르기 어려운 척 해본다. 유럽 긴 바캉스의 속사정이 어떠한들, 변하지 않는 사실은 따로 있다. ‘쉼’의 중요성은 같다는 것.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잘 쉬는 자가 오래간다는 것. 물론 우리 모두가 긴 휴가는 못 가더라도, 바캉스라는 단어가 지닌 본래 의미, 즉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로움’만은 잊지 않기를!

▲최윤정

‘부르주아’라는 성을 물려준 셰프 출신 시어머니의 자취를 좇으며 현재 벨기에에서 여행과 요리를 엮어내는 팝업 레스토랑 ‘tour-tour’를 기획·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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