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상의 꽃피움과 시장경제

2024-09-19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하게 이번 추석명절은 한여름 같은 더위 때문에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기후변화가 이제 명절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몇만 년에 걸쳐 일어나던 자연환경의 변화가 요즘 인류활동의 영향으로 몇십년만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지구상의 기후만 질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고, 인류의 삶도 질적으로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래 살게 되고, 인구는 줄어드는 추세고, 세계는 하나가 되어 가고, 기술은 정신 못 차리게 발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치도 경제도 예전의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화를 겪고 있다.

국제 권력질서를 보면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 한편이 되고,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이란은 이에 맞서는 대결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이 세력들간의 대리전쟁이 중동에서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다. 국지전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IT시대 경제의 상호의존성일 것이다.

한국이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한 시기를 살아와서 세상의 엄청난 변화에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는 세대에 속하는 필자도 갈수록 게임의 규칙이 바뀌고 있다는 푸념을 하게 된다. 특히 요즘 인공지능의 발전이 가져올 앞으로의 세상 모습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혼란스러운 시대다. 이럴 때일수록 세상을 근본적으로 다시 이해하고 방향타를 고쳐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9년에 발간한 ‘역사의 기원과 목적에 관해서’라는 제목의 책에서 기원전 8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시대를 ‘축의 시대’라 명명하였다. 이 시기에 지리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인도, 중국, 중동,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에서 후대에 인류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는 보편적 사상들을 설파한 종교가, 철학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하였다. 석가모니, 공자, 이사야, 플라톤이 이 시기에 활동한 사람들이다.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다양한 사상들이 꽃을 피운 이 시기는 네 지역 모두 하나의 질서에서 다른 하나의 질서로 이행하는 과도기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런 과도기에는 수많은 정치세력들이 군웅할거하며 경쟁한다. 지나간 질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불확실성 속에서 방향을 제시할 누군가가 필요한 때다.

그런데 경제적 관점에서 이 시기 네 지역의 공통점을 한가지 찾자면 화폐인 주화의 발행이다. 이는 우연일까, 아니면 주화의 발행과 사상의 꽃피움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연관성이 있다면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일까.

아무래도 인과적으로 주화발행이 앞서는 것 같다. 화폐는 물물교환과 재산축적의 수단이니 주화발행은 시장의 형성과 함께 진행된다. 시장이 있어야 화폐가 발행되고, 화폐가 있어야 시장이 활성화된다. 시장이 형성되고 부가 축적되어야 먹고사는 데 급급하지 않고 고담준론에 몰입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계층의 사람들이 생겨날 수 있다.

축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제국들이 출현하였다. 과도기에 꽃핀 사상 중에서 경쟁에 이긴 사상은 이후 출현한 제국적 질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였다. 제국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시장도 확대되고, 이에 따라 제국의 주화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화의 널리 쓰임은 사상의 꽃피움의 결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다양한 사상의 꽃피움과 시장의 확대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시장경제는 다양한 사상의 거름진 터전이고, 다양한 사상은 시장경제를 지탱하는 힘이다. 사상을 통제하는 곳에서는 시장이 융성할 수 없다. 사상의 시장은 재화의 시장과 함께 커간다.

채수찬<경제학자/카이스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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