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선진국의 역설…위기 속에 커지는 ‘자국민 우선주의’

2025-10-10

유럽이 요동치고 있다. 건실한 경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복지, 성숙한 시민의식과 의회 제도를 통한 안정적 국가 운영을 자랑하던 과거 모습은 사라졌다. 고물가와 경기 침체, 타협에 대한 거부가 사회 전반에 뚜렷해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 리더십은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불안만 더 가중하고 있다.

대표적 나라는 프랑스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8년 동안 7명의 총리를 교체하며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최다 기록을 세웠다. 지난 6일(현지시간)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총리는 취임 27일 만에 사임했다. 올 들어 세 번째 내각 붕괴이자, 현대 프랑스 역사상 총리 최단 재임 기록이다. 여당인 중도보수 르네상스는 하원 577석 중 161석만 확보해 국정 운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촉발은 재정 위기에서 비롯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가 116%, 재정 적자가 5.8%에 달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등 사회복지를 줄이는 재정 개혁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우파와 좌파 모두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안을 거부하고 내각을 잇따라 붕괴시켰다. 피치는 “정치적 분열”을 이유로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강등했지만, 프랑스 국민 수십만명은 지난달 거리에 쏟아져 나와 “공휴일 축소 반대” 등을 외치며 버스를 불태우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폴리티코 등 외신은 “프랑스가 유럽의 병자로 전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영국은 헐값에 고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외국인으로 경제의 밑바닥을 메웠다. 지난 3년간 합법 이민자는 450만 명, 불법 입국자는 매년 수만 명에 달했다. 소형보트를 타고 영국 해협을 건너는 불법 난민만 해도 올해 2만9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저임금 외국인으로 경제구조를 유지하겠다는 구상은 곧 난관에 부닥쳤다. 몰려 들어온 외국인으로 물가와 주거비가 급등하고, 그 결과 영국 중산층이 무너졌다. 영국의 실질임금이 팬데믹 이후 정체 상태다. 의료 대기자는 760만 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할만큼 사회·복지 체계의 균열 현상도 두드러졌다.

유럽 주요 국가들이 동시적 위기에 빠진 이유는 누적된 정책 실패의 결과다. 그나마 유럽에서 경제가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는 독일조차도 그렇다. 독일은 2023년 -0.9%, 지난해 -0.5%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독일은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해 왔으나,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급 악화와 급진적 재생 에너지 전환이 맞물리면서 산업 경쟁력이 추락했다.

정치적으로는 중도·기득권 정당에 대한 신뢰가 붕괴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등 유럽 주요 지도자들은 소속 정당과 별개로 대체로 중도 지향적 정치를 표방했다. 그러나 복잡해진 경제·사회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민 문제는 유럽 국가들의 갈등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일자리와 복지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하면서 유럽 중산층은 자신들의 몫이 줄어들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민자에게 돌아갈 복지, 세금을 내는 국민이 빼앗긴다”는 인식이 퍼지며 점차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자국민 우선’ 구호를 외치는 극우 정당의 급부상 토대를 마련해줬다.

프랑스의 극우 ‘국민연합(RN)’, 영국의 극우 ‘영국개혁당(Reform UK)’은 모두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다. RN의 경우 제도권 정치에 뿌리를 깊숙하게 내려 “프랑스가 유럽연합(EU) 내 극우 축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폴리티코)”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영국 데이터분석업체 유고브 조사에선 영국인의 44%가 “지금 정치 의제를 주도하는 세력은 개혁당”이라 답했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지지율 25~26%로 1위를 달리는 독일의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아예 국경을 넘은 우파 연대의 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JD 밴스 미국 부통령,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대놓고 AfD를 지원했다. “AfD 인사들이 미국 트럼프 진영과 접촉하며 미국 극우와의 연대를 선언했다(DW)”는 평가를 받고있다.

동유럽은 이미 극우 중심 정치로 재편됐다. 지난 3~4일 체코 총선에서 ‘프라하의 트럼프’로 불리는 안드레이 바비시의 극우 ‘긍정당(ANO)’이 34.7%로 압승했다. 지난 6월 폴란드 대선에서도 극우 ‘법과정의당(PiS)’의 지지를 받은 카롤 나브로츠키 무소속 후보가 승리했고,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와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유럽의회에서 일찌감치 큰 목소리를 내고있다.

한 유럽 외교관은 이런 현상을 두고 “이제 유럽의 물결은 바뀌었다. 프랑스·영국·독일 모두 국민이 (이전과는) 다른 선택을 원한다”며 “문제는 그 선택이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있느냐는 것”이라고 폴리티코에 말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