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15년 12월 12일. ‘북한판 걸그룹’으로 통하는 모란봉악단이 첫 외국 공연인 중국 베이징 국가대극원 공연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돌연 귀국했다. 북·중 당 간부가 다수 참석할 예정이었던 공연이 갑작스레 취소되자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북·중은 이에 대해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당시 국정원은 공연 내용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찬양 일색이라 중국 측이 관람자의 격을 낮췄고, 이에 반발한 북한이 공연을 취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국회에 보고했다. 백두혈통 3대 세습을 정당화하려 한 것이다. 외신 보도와 정보 소식통의 전언 등에 따르면 공연의 배경으로 쓴 스크린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장면을 담고, 극단적인 반미 메시지를 포함한 점 등에 중국이 불편해 했다고도 한다.
10·10 열병식, 각국 고위급 참석
‘핵 가진 채 정상국가’ 노리는데
대통령실 “북 내부 행사” 입장만
북한도, 중국도 이때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꼭 10년 뒤인 2025년 10월 10일 중국의 권력 서열 2위인 리창(李强) 총리가 김정은 바로 옆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이 처음 공개되는 열병식을 함께 관람할 줄은 말이다.
특히 지난해 5월 북한이 무리한 정찰위성 발사 실패로 세계적 망신을 샀던 배경이 리창이 참석한 한·일·중 정상회의 공동선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언급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정은과 리창 모두 어떤 의미로는 격세지감까지 느꼈을 터다. 지난달 김정은이 방중하며 딸 주애를 대동, 사실상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향해 백두혈통 4대 세습을 예고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국제사회의 대표적 왕따였던 김정은의 ‘클라스’가 달라졌다.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 전쟁에 특수부대를 파병할 때만 해도 무모한 도박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필요에 의해 맺어진 비즈니스 관계일 뿐, 쓰임이 다하면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토사구팽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비록 이런 관계의 속성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북·러 간 ‘나쁜 혈맹’은 예상과 달리 상당 기간 계속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가 점령했던 러시아 영토 쿠르스크를 탈환하는 데 크게 기여한 북한군은 이제 공병으로 역할을 바꿔 전후 재건 사업에 투입됐다. 러시아가 쉽게 손을 놓지 못하도록 북한 스스로 계속 쓸모를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은 이를 통해 러시아로부터 미진한 ICBM 기술을 비롯, 첨단 무기 관련 기술 등을 반대급부로 얻어낼 심산이다.
그간 북·러 밀착에 거리를 두며 경계해왔던 중국도 ‘변심’했다. 관세 전쟁을 비롯, 미국과의 전방위적 갈등이 격화하는 가운데 북·중·러가 뭉치는 반미 연대 형성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은 곧 천안문 망루에 3국 정상이 나란히 서 세를 과시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지난 10일 북한의 당 창건 80주년 기념 열병식은 어느 때보다 높아진 북한의 몸값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리창뿐 아니라 또럼 베트남 서기장,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집권 통일러시아당 의장 겸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이 주석단에 함께 올랐다. 인도네시아는 외교장관을 파견했다. 직전에는 통룬 시술리트 라오스 국가주석이 북한을 찾았다.
방북한 인사들의 면면만 보면 번듯한 다자 외교 행사라 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다. 김정은 집권 뒤 방북한 국가 정상 자체가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포함해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정은의 위상이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핵 문제에서 지금이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북한이 핵을 가진 채로 국제사회에서 정상국가로 인정받는 수순을 밟는 게 될 수 있어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제안한 ‘E·N·D(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 이니셔티브’에 대해 북한이 비핵화 대화를 전면 거부하는 현실을 고려한 제안이라는 평가와 비핵화로 가는 방향성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E-N-D 간에 선후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북한이 모처럼 꽃놀이패를 양손에 쥐고 ‘핵 보유 정상국가’를 노리는 시점에 관계 정상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건 위험성이 따를 수 있다.
ICBM뿐 아니라 대남 타격용인 극초음속미사일과 재래식 무기가 대거 등장한 북한 열병식에 대해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내부 행사”라는 대통령실의 입장을 보면 걱정은 더 커진다. 남일 이야기하듯 할 때가 아니다. 김정은의 ‘핵 보검’이 영원히 우리를 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