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 때워서 이뤄냈다, 우리 강산 ‘푸르게’ 역설

2024-10-23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화폐개혁과 이병철 회장

2004년 화폐개혁 문제가 논란이 됐다. 내 경험에 비춰 볼 때 화폐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다.(※편집자주: 박태준이 중앙일보에 회고록을 연재하던 2004년 당시 화폐개혁 논쟁이 있었다. 한국은행이 화폐의 가치를 1000분의 1로 줄여야 한다는 입장(디노미네이션)을 우회적으로 밝히며 정치권에서도 1000원을 1원으로 바꾸자는 입법 논의까지 있었다. 거센 찬반 논란 속에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내가 처음 국가경제 일선의 책임을 맡은 것은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옮기면서다. 그해 연말에 나는 유럽통상사절단장으로 처음 유럽을 방문했다. 말이 통상이지 한국은 수출할 공산품이 없었다. 텅스텐 캐내고 오징어 잡아서 근근이 달러를 벌어들이는 가난뱅이 신세였다. 미공법(PL)480에 따라 공짜로 원조받은 미국의 밀과 면화 등 잉여 농산물을 국내 제분업체와 방직업체에 되팔아 그 돈으로 연명하는 나라였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내가 신뢰하는 경구(警句)다. 유럽 방문 때 나는 그쪽 산업 현장을 꼼꼼히 살폈고, 많은 것을 배웠다. 부럽기 짝이 없었지만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강한 의욕이 생겼다. 이때 보았던 눈 덮인 베를린의 분단 철조망은 잊히지 않는다.

나는 89년 12월 말 파리에서 베를린 장벽의 붕괴 소식을 들었다. 고르바초프 부부가 환히 웃으며 손뼉을 치는 뉴스를 보면서 곧장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광양제철소 설비 구매협상 일정에 쫓겨 도저히 틈을 낼 수 없었다. 더구나 노태우 대통령이 내게 민정당 대표를 맡아달라고 종용하던 때라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62년 연초부터 한국은 ‘단기(檀紀)’를 버리고 ‘서기(西紀)’를 시행했다. 근대화 의지의 표현이었다. 또 ‘환’이란 화폐 단위가 촌스럽다는 듯 극비리에 화폐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화폐개혁은 상공담당 최고위원인 나도 몰랐다.

그해 6월 초순 송요찬 내각 수반이 경제 담당 공무원들과 경제인들을 ‘대하’라는 요정으로 불렀다. 재계에선 삼성 이병철 회장을 비롯해 이정림·남궁련씨 등이 나왔다. “저녁 8시에 중대 발표가 있다”는 송 수반의 말에 모두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중대발표였다. ‘환’을 ‘원’으로 바꾸고, ‘10대 1의 평가절하’를 하고….

경제인들은 한결같이 깜짝 놀랐다. 송 수반이 “왜 기뻐하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자 이병철 회장이 “착상은 기발하지만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곤란한 사람은 많고 득 볼 사람은 적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독은 워낙 인플레가 심해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고 했다. 뒤에 들으니 이 회장은 이튿날 아침에 박정희 의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똑같은 의견을 개진했다고 한다.

한 시간 먼저 우리에게 귀띔해 준 송 수반도 화폐개혁에선 들러리 신세였다. 최고위원 중에는 재정 담당 류원식이 주무였다. 또 김종필의 천거로 한국은행 출신인 김정렴이 실무팀을 짰으며, 영국에 가서 새 지폐를 인쇄한 책임자는 천병규 재무부 장관이었다. 김종필-류원식-김정렴이 핵심 라인이었고, 최종 결정은 물론 박 의장이 내렸다.

어마어마한 혼란이 일어났다. 부랴부랴 산업은행 안에 화폐개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류 위원은 최고위원들에게 “화교들의 돈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지만 결국 물러나야 했다. 더 큰 난제는 미국이었다. 유솜(USOM·주한 미국경제협조처)이 ‘괘씸죄’를 적용해 잉여 농산물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건 아기의 젖줄을 끊겠다는 으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존심을 굽히고 나를 비롯한 몇 사람이 유솜에 몇 번이나 찾아가 고개를 숙여야 했다. 달포 만에 간신히 그들의 철회 결정을 얻어냈다.

연탄과 국토 산림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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