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전선, 정보전쟁] 이스라엘의 핵무기 정보전
이스라엘은 핵보유국이면서도 핵보유국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는다’는 미국과의 밀약 때문이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식 핵보유국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은 험로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수에즈 전쟁 참여 대가로 얻은 핵무기 개발 기회가 프랑스의 중동 정책 변화와 미국의 견제로 곤경에 처하자, 정보를 통해 프랑스의 정책 변화를 극복했고 외교를 통해 미국의 견제를 넘어서는 등 정보와 외교를 넘나든 긴 여정 끝에 핵 개발을 완성했다. 그 여정 속으로 들어가 보면 험로를 극복한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수에즈 전쟁 참여 대가 핵무기 개발 기회
출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지원하기로 은밀히 약속했기 때문이다. 1956년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운하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을 통해 운하 재장악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전쟁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이집트의 앙숙인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켜 주면 이를 빌미로 개입해 나세르 정권을 무너뜨린다는 구상을 세웠다. 특히 프랑스는 나세르가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독립전쟁을 돕고 있어 눈엣가시였는데, 이스라엘이 나세르를 제거해 주길 바랐다. 이스라엘은 이런 프랑스의 구상을 수락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지원이었다. 프랑스도 흔쾌히 수락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전쟁에 참여하는 ‘피의 대가’로 핵무기 개발 기회를 잡았다.
이후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프랑스의 지원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순항하던 핵 프로그램은 프랑스의 정책 변화로 중대한 도전을 맞았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프랑스의 중동 정책이 친(親) 아랍으로 선회하면서 핵물질의 이스라엘 공급을 돌연 중단했다. 이스라엘은 당황했다. 우라늄 등 핵물질은 국제적으로 엄격히 통제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모사드가 나섰다. 민간업체간 거래로 위장해 우라늄 광물을 빼돌리는 플럼뱃 작전(Operation Plumbat)이 시작됐다. 우선 이 작전을 도와줄 민간 협조자로 서독의 소규모 화학업체를 운영중인 헤르베르트 슐첸을 포섭했다.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에 대한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어 이스라엘에 협조적인 데다, 이스라엘군의 화학제독제 독점공급 특혜를 주어 확실한 협조자로 확보했다. 이후 모사드는 슐첸을 앞세워 1968년 3월 벨기에 광산업체로부터 우라늄 광석 200t을 주문한 후 비누생산용으로 위장해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의 거래허가도 받았다.
관건은 이를 은밀히 이스라엘로 빼돌리는 것인데, 우선 유령 해운회사를 설립해 우라늄 광석을 수송할 화물선 쉬어스베르크 A호를 직접 구입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이스라엘로 밀반출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항로와 일정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박을 구입한 모사드는 1968월 11월 우라늄 광석을 벨기에 앤트워프항에서 선적한 후 드디어 출항시켰다. 그런데 출항한 선박이 며칠간 종적을 감췄다. 우라늄 광물을 실은 선박이 사라지자 유럽 당국은 난리가 났다. 침몰·실종·피랍 신고도 없어 더욱 황당했다. 그러나 그사이 모사드의 쉬어스베르크호는 이탈리아를 지나 지중해 공해 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공해 상에서 우라늄 광물을 이스라엘 선박에 옮겨 싣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해군의 엄격한 감시 속에 환적된 우라늄 광물은 밤낮을 달려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핵시설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핵물질 확보 작전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더 엄격한 통제물질인 고농축 우라늄(HEU)은 대담하게 미국에서 밀반출했다. 1965년 미 펜실베이니아주 아폴로시의 우라늄 가공회사 넘멕(NUMEC)에서 고농축 우라늄이 대량 분실되는 아폴로 사건(Apollo affair)이 발생했다. 그런데 미 중앙정보부(CIA)는 이스라엘로 밀반출됐다고 결론 내렸다. 이스라엘 국방부의 핵무기 전담 비밀조직인 라캄(LAKAM)이 이 회사를 자주 방문한 사실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구체적 밀반출 경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정보당국이 핵물질을 비밀리에 확보해 주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차질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앞서 미국의 외교적 압력도 높은 도전이었다. CIA를 통해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 사실을 알게 된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며 디모나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을 요구했다. 이스라엘은 섬유공장이라며 버텼으나 미국은 무기판매 중단 등 강력히 제재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런데 1963년 11월 22일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이 여파로 미국의 압박이 크게 약화됐다. 이스라엘로서는 행운이었다.
숨 돌릴 시간을 확보한 이스라엘은 사활을 걸고 미 정치권에 대한 물밑 작업에 나섰다. 무엇보다 미국 입장에서 이스라엘의 핵 보유 장점을 적극 전파했다. 가령 소련이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믿을만한 맹방인 이스라엘의 핵 보유는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설득했다. 최소한 미국 정치권이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에 앞장서서 반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북 비핵화 위해 비밀 정보수단 활용 필요
여기에는 미 유대인 리더들이 앞장섰다. 특히 미 대통령 선거 때마다 정치자금을 후원하면서 미 정치권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한 아브라함 파인버그와, 닉슨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령, 키신저는 ‘적국들로 포위돼 간신히 생존하고 있는 이스라엘이야말로 핵무기가 가장 간절한 국가’라고 자주 말해 미국 사회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 정당성을 은연중에 스며들게 했다.
이 같은 여론전은 1969년 닉슨 대통령과 이스라엘 메이어 총리 간 정상회담에서 결실을 맺었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 보유를 선언하지 않으며, 핵무기를 전략적으로 노출시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의 핵 개발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은 표면상 미국의 비핵화 정책에 보조를 맞추면서 핵무기를 보유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를 핵 보유에 대해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호성 원칙’이라 한다.
이 내용은 대부분 비밀로 유지돼 오다 2006년 아브너 코헨과 윌리엄 버가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비밀 해제된 문서들을 토대로 연구한 ‘이스라엘, 문턱을 넘다(Israel Crosses the Threshold)’ 논문 등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은 정보가 뒷받침하고 외교가 결실을 이끌면서 유종의 미를 거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생존과 상식에서 출발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벤구리온 초대 총리는 적국들로 둘러싼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 개발은 상식이라고 봤다. 그래서 ‘핵 개발은 정치적 모험주의’라는 이스라엘 내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생존과 상식 차원에서 핵무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생존과 상식의 핵 개발 정당성 논리가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강대국 중심의 핵무기 통제질서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어서다. 북한 핵무기가 우리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고도화되고 있지만, 우리 마음대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공허하게 들리는 지금의 북한 비핵화 논쟁에만 매달릴 수도 없다.
결국 지금까지와는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북한의 비핵화를 조건으로 한 한시적인 미 전술핵 재배치, 핵물질 생산 능력 확보 등 과감한 군사·외교적 수단은 물론, 핵 보유를 계속 고집할 경우 김정은 체제 유지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는 은밀한 정보적 옵션까지 망라돼야 한다.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체제 진실 알리기, 통치력 소진 등을 은밀히 전개하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미 조지타운대 로이 고드슨 교수는 “비밀 정보활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술은 아니지만, 공개적 방법으로 해결이 어려울 경우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도 북한 비핵화를 위해 비밀 정보수단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공개적인 외교·군사적 수단으로는 30년 넘게 노력해도 풀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정보와 외교를 넘나들며 모든 공개, 비공개 방법을 동원해 국가 핵 목표를 달성한 이스라엘의 교훈이기도 하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