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모도 소총도 없이 전쟁터로, 전차 격파 자폭 훈련

2024-09-26

기획취재: 잊힌 현대사, 시베리아 억류의 기억과 기록

1. 강제동원 피해자 ‘시베리아 일본군 조선인 포로’들

2. “교사도 징병” 관동군에 끌려간 울산 사람 이규철

3. 철모도 소총도 없이 전쟁터로, 전차 격파 자폭 훈련

4. 기아, 혹한, 중노동…셀레트칸과 오렌부르크의 노예

5. 험악한 귀향길, 시베리아 억류자 피해보상과 과제

6. 러시아 공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독립운동가 한문해

1945년 8월 8일 새벽 무단장(牧丹江)역을 출발한 징병 열차는 밤이 깊어서야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 중학교에서 하룻밤을 보낸 장병들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송화강(松花江) 건너편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8월 9일 0시를 기해 대일전에 뛰어든 소련군의 폭격으로 하얼빈역전 철로가 파괴됐기 때문이다. 강 건너 철로에 대기하고 있던 베이안(北安)행 열차에 올라 목적지에 내린 건 저녁 무렵이었다. 이규철은 그곳에서 아베(安部) 부대에 입대했다. 아베 부대는 쑨우에 주둔한 관동군 제1방면군 제4군 123사단 소속이었다.

8월 10일 새벽 기상나팔 소리를 신호로 조선인 초년병들의 하루가 시작됐다. 연병장에 집합해 궁성요배(宮城遙拜, 일왕이 살던 곳을 향해 절하던 의식)를 한 뒤 군인칙유(軍人敕諭)를 제창하고 종일 군사훈련을 받았다. 저녁에는 내무반에서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라’는 전진훈(戦陣訓)을 암송했다.

8월 12일 이규철과 부대원들은 하루 전 새벽 소련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된 쑨우(孙吴)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만주개척단에서 허약한 자까지도 송두리째 끌어모은 일본군인들과 함께 우리들(한국인)은 전쟁터인 쑨우 진지로 향해 출발했다. 철모도 소총도 없는 무장을 하고 탄약상자를 교대로 들어가며 행군하기를 4시간여. 숲을 해치고 목적지인 쑨우 진지에 도착했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20쪽)

관동군이 남방 전선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은 1943년 가을부터였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관동군의 절반 이상이 태평양의 여러 섬과 필리핀으로 전출됐다. ‘남방전용(南方轉用)’ 관동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뿐만 아니라 만주개척단을 포함한 재만 일본인들까지 ‘싹쓸이’ 동원이 시작됐다. 17~45세까지 만주에 거주하는 병역이 가능한 일본인 남자 35만 명 가운데 25만 명이 소집됐다.

정예 병력이 태평양과 일본 본토로 빠져나간 관동군은 훈련과 장비 부족으로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됐다. <일본군사사>(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제이앤씨, 2013)에 따르면 관동군의 대소 작전계획은 종래의 공세작전에서 1944년 이후 수세작전으로 바뀌었다. 1945년 상반기에 수립된 계획에서는 연경선(連京線, 다롄-신징(창춘)) 동쪽과 경도선(京圖線, 신징-투먼) 남쪽, 즉 만주 동남부의 산악지대에서 버티는 지구전 작전으로 변경됐다. 일본 대본영의 이 계획대로라면 만주국의 3/4을 방위 범위에서 방기하는 셈이었다.

쑨우 호르모진(가쓰야마) 요새

헤이룽강(黑龙江, 아무르강)을 사이에 두고 소련과 마주한 쑨우는 군사 요충지였다. 관동군은 1934년 6월 이곳에 요새를 쌓기 시작해 1937년 말 완공했다. 만주어로 ‘돌배꽃이 피는 곳’이라는 마을 이름을 따서 호르모진(霍尔莫津) 요새라고 이름 붙였다. 본진이 승산(胜山)에 있어 가쓰야마 요새라고도 불렀다.

쑨우 일본침화죄증진열관(孙吴日本侵华罪证陈列馆)에서 얻은 <일본관동군 호르모진(가쓰야마) 요새(日本关东军霍尔莫津(胜山)要塞)>(내몽고문화출판사, 2011)에 따르면 호르모진 요새는 관동군이 만소‧만몽 국경을 따라 건설한 17개 요새 중 한 곳으로 샤오싱안링(小兴安岭)산맥 구릉지 350㎢에 구축했다. 123사단과 731세균부대 쑨우 지부인 673지대가 배치됐고, 3개의 비행장이 있었다. 본진인 가쓰야마 진지와 북지구, 동지구, 남지구 진지, 쑨비에라(逊别拉) 남방요새 진지, 마오란툰(毛兰屯) 야전 진지, 강안(江岸) 경비 진지 등 7개 진지로 이뤄졌다.

123사단에는 조선 등지에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 50여 명이 배속돼 약 2만 명의 병사를 상대해야 하는 성노예로 고통받았다. 이 가운데 전남 광양 출신으로 1935년 18세에 끌려와 10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받았던 문명금(文明金)이 있었다. 그녀는 같이 온 7~8명의 조선인 소녀들과 쑨우 일본 군영의 위안소를 전전하다 쑨우 군인회관(현 일본침화죄증진열관) 2층 네 번째 방에 갇혀 관동군 장교들의 성노예로 혹사당했다. 일본침화죄증진열관 2층에는 ‘위안부 피눈물의 역사’라는 주제로 ‘일본군 위안부’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일본이 패망하자 군인회관을 빠져나온 문명금은 윤씨 성을 가진 조선족과 쑨우에 정착해 살다 첫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은퇴한 건축직공과 재혼했다. 그녀는 한국과 중국의 공동 노력으로 1999년 64년 만에 고향 땅을 밟았다. 석 달간 임시체류 뒤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한국 국적을 회복해 영구 귀국한 문명금은 경기도 광주의 나눔의집에서 생활하다 2000년 11월 영면했다.

조선인에게만 자폭 훈련 강요

쑨우 진지에 도착한 이규철은 분대원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참호를 팠다. 8월 13일 새벽 건빵으로 배를 채운 조선인 초년병들은 전차 격파 자폭 훈련을 시작했다. 2미터쯤 되는 장대 끝에 원반 크기의 폭탄을 장착하고 수풀에 숨어 있다 뛰어들면서 전차 바퀴(캐터필러, 무한궤도) 밑에 밀어 넣는 훈련이었다. 작은 귤 상자만 한 급조 폭뢰의 안전핀과 군복 가슴 단추를 짧은 끈으로 연결한 뒤 1인용 참호에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전차 밑으로 뛰어들어 자폭하는 훈련도 했다. 관동군은 이 자폭특공대 임무를 조선인 초년병에게만 강요했다. 이규철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수기에 적었다.

소련 제2극동전선군 제2적기군은 8월 11일 새벽 승산 요새에 집중포화를 쏟아부으며 헤이룽강을 건너 호르모진과 하다양(哈大杨) 두 곳에서 동시에 돌진했다. 12일 소련군 주력부대는 대전차포 48문을 갖춘 1개 연대와 탱크 수십 대를 앞세워 서부와 북부, 북동부, 동부 등 네 곳에서 가쓰야마 진지를 공격했다. 공중에서는 전폭기가 수시로 날아와 강력한 폭격을 퍼부었다. 지상 포화에 공중 폭격기의 소사포격까지 겹쳐 가쓰야마 본진은 온통 연기와 불길 속에 휩싸였다. 탄약고에 있던 수십 톤의 폭약과 포탄, 유류 저장창고가 소련군의 폭격에 연쇄 폭발했다. 진지 좌지구 전진 부대였던 관동군 제123사단 제269연대 무라카미(村上) 대대가 본진에서 응사하며 버텼지만 포탄 부족과 곡사포 고장이 겹치면서 소련군의 집중포화와 빠른 진격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날 관동군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1000명 넘게 죽었고, 전차와 화포, 총기 대부분이 파괴됐다. 일본군은 훗날 이날을 ‘죽음의 날’이라고 불렀다. 

“훈련 중 소련기 내습으로 숲속에 피신해서 적기의 동태를 살폈다. 바로 우리 진지에 인접한 요새에 소련기가 급강하하면서 폭격을 하고 기총소사를 반복하는데 관동군은 대공 고사포를 쏘아 올렸으나 허공에서 작열할 뿐 한 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폭격을 끝낸 적기는 유유히 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전투기 한 대도 없는 관동군은 적기와의 공중전은 물론 적진 폭격은 엄두도 못 냈다. 승산 없는 전쟁이 한심스러웠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21쪽)

소련군은 13일 쑨우 근교의 비행장 일대를 점령하고 쑨비에라강을 건너 남쪽으로 쑨우현성을 육박해 들어왔다. 지상전과 공중전에서 절대 열세였던 일본군은 소대나 분대급 결사대를 조직해 소련군 탱크를 폭파하는 3인 1조 육탄 공격을 감행했지만 성공률은 높지 않았다. 갓 전쟁터에 투입된 이규철과 조선인 초년병들이 속성으로 받은 훈련이 바로 이 자폭 실전 연습이었다.

쑨우 진지 함락, 관동군 무장 해제

8월 15일 정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포하는 히로히토 일왕의 ‘종전조서(終戦の詔書)’가 라디오로 발표됐다. 제123사단 기타자와 사다지로(北沢貞治郎) 사단장은 16일 소련군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받아들이고, 17일 오후 5시 군기를 소각한 뒤 하산해 소련군 사령부에 투항했다.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제123사단 각 부대는 무기와 탄약을 지정된 장소에 모은 다음 짐과 옷가지, 식량 등을 챙겨 산에서 내려왔다. 18일 오전까지 쑨우 관사 거리에 집결한 하산 부대들은 지정된 포로수용소에 들어가 포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며칠 동안 산발적으로 포로가 된 장병들을 포함해 쑨우에서 항복한 관동군은 1만7061명이었다.

이규철도 진지에서 일본의 항복과 관동군의 무장 해제 소식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순간 ‘이제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에 우리 한국인 초년병들은 일본병들이 보는 앞이라 내색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기쁨을 참지 못했다.”(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22쪽) 두 명이 한 조가 돼 무기를 집결 장소에 실어 나르는데 같은 조인 오규환의 각반이 풀려 잠시 기다리는 사이 50미터 앞 무기 집결장의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하마터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땅의 귀신이 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총검으로 무장한 소련군의 감시하에 2킬로미터를 걸어 진지에서 하산한 이규철과 부대원들은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려 옛 관동군 병사에 수용됐다. 이튿날 새벽 4킬로미터가량 걸어서 철조망을 두른 연병장에 도착한 포로들은 시체 처리와 식량, 노획 무기 운반 등의 작업에 동원됐다. 이곳에서 1000명 단위의 작업대대로 편성된 이들은 8월 말 하얼빈 방면으로 철로를 수리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며칠을 종일 걸어 도착한 곳은 소련이 건너다보이는 헤이룽강변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였다.

헤이룽강 건너 ‘지옥행’ 열차에

9월 4일 아침 소련 감시병의 재촉으로 포로들은 배에 올라탔다. 이규철은 “이제는 고향으로 간다는 꿈은 사라지고 도살장으로, 지옥으로 끌려가는” 심정이었다고 수기에 썼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한 병사 한 명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20분쯤 뒤 포로를 실은 배는 건너편 강안에 닻을 내렸다. 아무르(헤이룽)강 너머 헤이허가 바라다보이는 소련 블라고베셴스크였다. 이규철과 포로들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포로 수송 화물열차에 올랐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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