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조의 만사소통] 설거지의 왕

2025-01-21

딸과 둘이서 점심을 먹은 후였다. 눈치작전에 돌입한다.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인가? 딸이 말한다. “아빠, 제가 할게요. 근데 좀 쉬었다가 천천히 할게요.” 아니, 할 거면 지금 하지. 왜 쉬었다가 해? 뭔가 복선이 있다. 꺼림칙한 나는 “아, 그래? 알았어” 하고 일단 대답했다. 근데 딸을 시키자니 그렇고, 내가 하자니 또 그렇다. 아빠라는 얄팍한 위신 때문에 말한다. “내가 할까?” 내가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할까?’라고 물어본다.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쪽에 가득하다는 뜻이다. “아, 그래요?” 딸의 목소리 톤이 한결 밝다. 아이고, 내가 해야겠구나. 나보고 하라는 거구나. 에잇, 지고 말았다. 오늘 설거지 당번은 나다.

언제부턴가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아내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큰 잘못을 해서 만회하기 위해선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솔직히 말해서 후자가 맞는 것 같다. 주식으로 돈을 날린 다음일 거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한 설거지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물론 매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즈음에는 설거지 횟수가 잦다.

막상 설거지를 하려고 하면 귀찮을 때가 많다. 밥 먹은 후에 우아하게 음악 들으며 커피 한잔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다. 설거지의 설 자도 몰랐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런데 싱크대 앞에 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빌 게이츠가 설거지를 좋아하는 것도 아마 이 새로운 세상의 맛을 알기 때문일 거다. 자, 그럼 그 세상으로 안내하리다.

먼저 운동이 된다. 식후에 바로 앉는 것보다 20∼30분 정도 서 있으면 뱃살이 덜 나온다는 얘기가 있다. 설거지는 뱃살을 관리하는 데 참 좋다. 자동으로 서 있게 되니 말이다. 여기에 신나는 음악이 곁들어지면 금상첨화다. 어깨 들썩이며 스텝을 밟으면 운동이 곱절로 되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하면 자동으로 소화되고 뱃살이 나올 이유가 없게 된다.

몸만 좋아지는 게 아니다. 마음도 좋아진다. 하얗게 일어나는 거품에 식기들이 뽀드득뽀드득 씻기는 것을 보면 마음도 맑아진다. 거품은 파도가 부딪힐 때 나오는 하얀 포말 같기도 하고, 뽀드득 소리는 뒷산에서 들리는 새들의 경쾌한 지저귐처럼 청량하다. 하루 24시간 중에 그 어떤 순간에도 느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깨끗하게 씻긴 식기들을 보면 마음의 찌꺼기까지 없어지는 것 같다.

그리고 아내의 예쁜 마음도 알게 된다. 밥 먹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사용했던 숟가락과 젓가락, 그릇이며 접시들이 아내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로 마련된 것임을 알게 된다. 식기들의 디자인과 색깔을 선택할 때 아내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아마 식탁에 모여 앉은 식구들을 떠올리며 사랑의 손길로 준비했으리라. 식기에 수놓아진 문양을 손으로 만지며 느껴본 적이 있는가? 식기의 매끄러운 질감을 음미해본 적이 있는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새삼 아내의 손길을 느끼니 그 마음과 정성이 예쁘기 그지없다.

이번 설 명절은 절호의 찬스다. 아내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는, 그리고 설거지의 왕이 될 수 있는 찬스 말이다. 고향 친구들 좀 적게 만나고 ‘설거지는 내가 맡겠다’고 선언할 참이다. 아내에게 사랑을 가장 쉽게, 가장 일상적으로, 또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이 기다려진다. 설거지와 소통해보시라. 새로운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딸, 앞으로는 건드리지 마라. 설거지는 내 거다. 하하하.

김혁조 강원대 교수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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