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진민경 기자) 석유화학산업 구조조정을 둘러싼 정부 방침에 은행권 내부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가 중국의 저가 공세로 위기에 빠진 국내 석유화학업계를 살리겠다며 은행권에 ‘구조조정 펀드’와 ‘여신 유지’를 사실상 요구하면서 은행들이 고위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산업의 수익성 회복이 불분명한 가운데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 은행권은 충당금 적립, 금리 조정, 만기 연장 등 다방면에서 리스크 노출이 불가피하다.
◇ 정부, ‘말뫼’ 사례 경고하며 금융권 책임 강조
석유화학은 철강, 조선, 자동차, 반도체와 함께 한국 제조업의 중추 산업이다. 이에 정부는 석유화학업계의 의기를 산업기반 붕괴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중대 사안으로 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석유화학 구조조정의 열쇠가 금융권에 있다며 금융권의 ‘공동 책임론’을 강조하고 있다.
앞서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은 지난 21일 간담회에서 “석유화학은 우리나라 산업경쟁력의 근간을 이루는 기간산업이지만, 더 이상 수술을 미룰 수 없는 처지”라며 “말뫼의 눈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말뫼의 눈물’은 1987년 스웨덴 조선산업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스웨덴 말뫼의 세계적 조선기업 코쿰스가 파산하며 세계 최대 규모였던 코쿰스크레인이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매각된 것을 가리킨다.
또 권대영 부위원장은 “지금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때”라며 “줄을 묶고 함께 건너면 정부가 손을 잡아주겠지만, 홀로 걸어가면 얼음이 깨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권이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리스크가 금융시장 전반으로 확산될 가능성을 방지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 위기의 석유화학
정부가 전방위 구조조정에 나서는 배경에는 국내 석유화학 업계 전반의 급격한 실적 악화가 있다. 중국의 공급 과잉과 가격 덤핑으로 글로벌 시장 경쟁이 격화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줄줄이 적자를 기록 중이다.
한화와 DL그룹의 합작사인 여천NCC는 당장 올해 말까지 3100억원 이상을 마련하지 못하면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놓이게 된다. 1년 내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만 1조원이 넘고, 일부 회사채에는 크로스 디폴트 조항까지 걸려 있는 상태다.
롯데캐미칼, LG화학 등 다른 주요 기업들도 일부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수천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는 등 상황은 비슷하다. 롯데캐미칼은 올해 2분기 2449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7개 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LG화학 또한 일부 공장을 멈췄다.
이에 대해 오윤재 한국신용평가 수석연구원은 “현금흐름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유동성 대응능력에 대한 우려가 지속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은행권 “위험은 우리 몫… 충당금까지 쌓으란 말이냐”
정부는 ‘선 자구노력 후 지원’을 구조조정 원칙으로 제시하며 기업 스스로 자산 매각과 사업 축소 등 구조개편을 먼저 진행해야 금융 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다만 자금 공급을 담당하는 은행권에선 정부의 정책 방향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의 저가 공세가 지속되고 글로벌 공급 과잉 문제도 이어지고 있어 국내 석유화학기업들이 단기간에 실질적인 수익 개선이나 경쟁력 회복을 이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회복 가능성이 불투명한 산업에 대출을 늘리고 여신도 유지하면서 펀드 자금까지 출연하라는 것은 손실을 감수하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며 “여신을 유지하다가 나중에 만기를 연장하고 금리를 낮춰야 한다면 손실은 고스란히 은행 몫이 된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구조조정 참여 자체보단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감당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석유화학에 대한 충당금 적립이 확대되면 타 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 여력까지 위축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실무협의회 예정…리스크 분담 구조 마련이 핵심
정부와 여당에서는 민간 금융사 재원으로 펀드를 조성해 석유화학업계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형성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은 지난 7월 발간한 ‘진짜 대한민국을 위한 금융의 역할’ 보고서를 통해 석유화학 등 취약 업종 구조조정을 위해 민관 합작 대출형 사모펀드(PDF)가 설립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임규빈 민주연구원 연구원은 “지난 정부의 세수 결손, 불확실한 통상 질서, 세계의 기술 패권 경쟁 강화 등으로 국가의 재정 여력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라며 “국가 산업 정책을 위한 대규모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공공 금융기관의 정책금융과 민간 금융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정부는 다음 달 예정된 실무협의회에서 여신 조정, 금리 인하, 펀드 조성 규모 등을 논의할 계획이다. 하지만 은행권에서는 리스크 부담 구조가 명확하지 않으면 적극적인 참여가 어려울 것이란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기업이 실질적인 자구노력을 보이고 정부도 일정 부분 리스크를 감수하는 구조가 마련돼야만 은행권의 적극적인 참여가 가능할 것”이라며 “지금처럼 은행이 위험을 전적으로 떠안는 ‘폭탄 돌리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고 전했다. 결국 구조조정의 성패는 ‘누가 얼마만큼 위험을 나눠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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