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가 사라진 사회

2025-05-12

공무원에게 제일 무서운 사람은 누구일까.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본 글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민원인? 아니다. 겁박하면서 험한 말을 쏟아내는 사람보다 민원처리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차근차근 상위 감독기관에 민원을 넣는 민원인이 더 무섭다고 한다. 말 그대로 ‘폭탄 민원’을 넣는다. 같은 사실관계를 조금 내용을 달리하여 넣는다. 악의적인 민원 때문에 행정이 마비된다. 물론 ‘선을 넘는 경우’, 업무방해로 처벌받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한’ 어찌 됐든 법적인 문제는 없다.

권리는 항상 권리일 수는 없다. 무슨 말일까. 한 사람에게 주어진 법적인 힘의 행사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하버드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저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에서 말한다. 민주주의는 항상 위험한 제도지만, 정치적 견해가 다른 상대를 민주주의 틀 내에서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내용의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과 권력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할 때 절제를 하는 내용의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특히 제도적 자제는 과거 유럽의 군주제에서 군주에게 찾아볼 수 있었던 덕목으로 지속적인 자기 통제와 절제, 인내라는 미덕을 통해 법을 존중하면서도 법으로부터 주어진 권한을 입법취지를 훼손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성찰하는 태도를 말한다. 제도적 자제의 예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3선 포기가 있다. 워싱턴 이후 대통령들은 제도적으로 3선을 제한하는 법은 없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가 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워싱턴이 만든 관례를 존중하였다. 이후 루즈벨트가 3선을 하게 되자 결국 3선 제한을 내용으로 하는 수정헌법 제22조가 제정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상호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사라져 버렸다. 자신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대상은 모조리 적으로 취급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0.73% 차이의 득표를 받은 거대 야당 지도자를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상호관용은 없었다. 제도적 자제는 잘 이루어졌을까. 야당대표에 대한 수사와 기소는 어찌되었든 외형상 법무검찰의 적법한 권한내의 행사였다. 야당은 야당대로 정부 주요 각료에 대한 수십번의 탄핵을 했다. 이 또한 국회의 적법한 탄핵소추권의 발동이다.

제도적 자제가 사라져버린 가장 대표적인 예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지난 4월 8일 2명의 후임 헌법재판관을 지명한 일이다. 당시 한 대행의 지명이 적법한지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권한대행의 적극적 권한 행사에 대해 견해가 갈렸다. 하지만 한 대행이 제도적 자제를 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지난 5월 1일 대법원은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법 사건을 유죄취지 파기 환송했다. 선거법 사건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져야 한다. 대법원의 권한 행사는 적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헌법재판관 임명과 마찬가지로, 자제가 없었다. 대한민국의 최고법원이 법으로부터 주어진 권한을 절제하지 못했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0년대 초반, 그의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서문에서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썼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난 현재, 불행히도 더 나빠진 듯 보인다.

나영주 법률사무소 신세계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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