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핌] 장환수 스포츠전문기자= (1편에서 이어짐) -장환수 기자: 한국 기록을 처음 세우고, 물론 나중에 한 번 더 세우시지만 바르셀로나로 바로 가지 않습니까. 거기서도 보면 일본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땄지 않습니까. 일본 선수가 2등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손기정 선생님이 1930년대에 최초로 30분 벽을 깨고 일장기를 달고 뛰었지만 대한민국 사람들한테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거 하고 우리 황 감독님하고 일맥상통하거나 평행이론 같은 게 존재하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손기정과 황영조의 평행이론
황영조 감독: 영국 셰필드 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을 딸 때도 2등 선수가 일본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도 모리시타 선수가 은메달을 땄고요.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딸 때도 하야타 선수가 은메달을 땄습니다. 이름을 다 기억하죠. 레이스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그런데 이제 바르셀로나 올림픽 같은 경우에는 손기정 선생님께서 바르셀로나 몬주익 경기장에 와서 직접 라이브로 생전에 보셨죠. 당시 손기정 선생님께서 늘 우리 후배 마라토너들한테 이야기한 게 내가 죽기 전에 우리 대한민국 선수가 금메달 따는 모습을 보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개인적인) 바람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아픈 역사였잖아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기였을 때 손기정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지 못하고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고,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딸 수밖에 없는 참 슬프고 아픈 금메달이죠. 기억하고 쉽지 않은 우리의 역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을 제가 56년 만에, 그것도 아프리카 선수가 아닌 일본 선수와 10km를 경쟁하면서 따냈거든요. 제가 질 수도 있는 게임이었어요. 저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몬주익 언덕에서 진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선수만큼은 꼭 이겨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뛰었고,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됐죠.
그러다 보니까 손기정 선수하고 저하고 연관되는 부분이 있다면 당시 시상대에 올라간 선수가 1등은 한국이고, 2등은 일본, 3등은 독일이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때, 일본 선수가 3위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회 날짜도 8월 9일로 같습니다. 장소도 같은 유럽이고요.
-장환수 기자: 정말 특별한 인연이네요.
황영조 감독: 아주 그렇죠. 어떻게 보면 손기정 선생님하고 저하고는 어떻게 보면 각본 없는 드라마 같은 그런 상황이었죠.
-장환수 기자: 그리고 족저근막염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셨는데. 부상이 사실은 그전부터 조금씩 앓고 있었다, 고질병이었다는 말도 있는데요. 족저근막염이 우리 황 감독님의 활짝 핀 꽃을 더욱 만개시키지 못하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황영조 감독: 제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가기 전에 이미 족저근막염이 왔어요. 저는 워낙 파워풀하게 뛰는 주법을 구사하는 선수였습니다. 제가 킥이 좋아요. 그러다 보니까 훈련 강도도 세고 훈련 량이 많다 보니 발바닥에 족저근막염이 왔어요. 그런데 당시 제가 기억하기로 그때는 자석 같은 거 '빠삐 자기방'이라고 해가지고 그걸 막 붙이고 혈을 돌리면 빨리 나아진다 해서 발바닥까지 참 무식하게 붙이고 뛸 정도였어요.
◆올림픽 가기 전부터 앓았던 족저근막염
그러면서까지 운동을 했는데 이 족저근막염이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또 첫 발을 내디딜 때 바늘로 쑤시듯이 아파요. 고통스럽습니다. 그 정도로 이 족적근막염이 심하게 왔어요. 그래도 올림픽은 진짜 4년에 한 번씩 오는 기회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부상을 안고 준비를 한 겁니다. 제가 뭐 운이 좋아서 이렇게 금메달을 땄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고 금메달을 딴 거예요.
족저근막염을 저는 그런 고통을 죽을병은 아니라는 마음을 갖고 훈련을 했고요. 올림픽을 계속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금메달을 따게 된 거죠. 제가 뭐 엄청나게 좋은 컨디션을 가지고 준비가 잘 돼가지고 금메달 딴 건 아니었어요. 부상을 안고도 연습을 포기하지 않고 한 거죠.
-장환수 기자: 족저근막염조차도 자신에게 찾아온 축복일 수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황영조 감독: 축복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죽을병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저는 멘탈을 가다듬고 그걸 극복한 거죠.
-장환수 기자: 부상이 온 뒤에 1년 4개월이나 공백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 1년 4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마라톤을 하지 않았는데, 다시 한국기록을 세웠다는 게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참 궁금합니다.
황영조 감독: 그렇죠. 족저근막염 수술을 하고 나서 저는 운동화를 신을 수가 없었죠. 오랜 시간 회복기를 가졌고, 93년도에는 제가 시합을 뛰지 못했죠. 그러고 나서 다시 훈련을 진행했죠. 사실 훈련 시간은 좀 짧았습니다. 충분한 훈련을 하지 못했음에도 다시 2시간 8분 9초로 한국 기록을 경신하고, 그 해에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까지 이어져 금메달을 따 가지고 왔죠.
몸이 기억을 합니다. 제가 부상으로 운동은 못했지만 그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정상적인 운동이 아니었던 거죠.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로 우승을 했는데 섭씨 30도가 웃도는 그런 더운 날씨였고요. 마지막 오르막이 상당히 가팔라서 남산 같은 코스를 뛰어 올라갔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당연히 기록은 안 나왔죠. 그런데 그때 제가 훈련을 해뒀던 게 부상에서 돌아와서도 8분대까지 그냥 간 거죠. 사실 제가 당시에 정상적인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제가 볼 때는 상당히 좋은 기록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뭐 그런 아쉬움은 좀 갖고는 있습니다.
-장환수 기자: 세계 기록까지 나왔을 것 같은데요.
황영조 감독: 예. 당시 세계 기록이 2시간 6분 50초였습니다. 제가 올림픽 가서 금메달 딸 때 참가한 선수는 2시간 7분대, 8분대 선수들이었죠. 요즘 같으면 지금 마라톤 기록이 2시간 0분대까지 갔으니까, 못해도 2시간 1분대나 2분대 기록으로 제가 올림픽에 나간 거죠. 지금 한국 마라톤은 10분 안에도 못 들어오고 있는데 그만큼 제가 세계 톱클래스에 가 있었던 선수였죠.
◆"마라톤은 결국 스스로 하는 겁니다"
-장환수 기자: 지금 우리 한국 선수들은 2시간 10분대 벽조차도 못 들어오고 있지 않습니까. 감독님께서 25년간 지도자로 활동하고 계신데 감독님을 비롯한 우리 한국 지도자들이 문제가 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황영조 감독: 글쎄요. 제가 생각할 때 지도자들은 선수들에게 인도자 역할을 하는 거예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는 건 선수가 해야 되는 거예요. 마라톤은 팀플레이가 아니에요. 야구 축구 이런 것은 감독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선수기용을 한다든가 그래서 어떻게 저 팀을 분석해서 이길 건가를 연구해야 되지만 마라톤은 본인이 뛰는 거예요. 연습이 됐으면 그냥 시합 뛰는 거예요. 연습이 안 된 선수에게 시합 가서 감독이 아무리 좋은 지시를 한다 해갖고 됩니까.
내 지시대로 뛰면 다 금메달 따죠. 이거는 본인한테 영향력이 충분하게 가게 해야 하는 스포츠예요. 물론 훈련프로그램을 잘 만들어서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파악해갖고 최대치를 끄집어내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긴 합니다만 결국은 선수가 해야 되는 운동이거든요.
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저희 팀 선수들은 연봉이 3000만 원 넘어가는 선수가 한 명도 없어요. 대한민국에 팀이 90개 가까이 되는데 저희 팀이 제일 열악해요. 요즘은 선수들이 좀 뛴다 하면 계약금 1억에 연봉 7000만 원은 맞춰줘야 돼요. 근데 저희는 뭐 계약금은커녕 연봉이 3000만 원, 2000만 원대를 주고 선수들을 데리고 와서 어떻게 우승을 합니까. 말 자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걸 사람들은 몰라요.
황영조는 잘 뛰었지만 선수는 못 키운다. 좋은 선수를 데려와야지 어떻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좋은 선수 데리고 간 팀도 지금 올림픽도 못 나가고 있는데요. 그래서 저는 할 얘기 다 하는 사람입니다. 알다시피 제가 뭐 남 눈치 보는 스타일도 아니고요.
-장환수 기자: 자 다시 돌아가시죠. 감독님께서 빠른 은퇴를 하시고 그 이후의 삶은 사실 일반 팬들은 잘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황영조 감독: 1996년도에 운동화를 벗고요. 그해 대한민국 국가대표 꿈나무 선수들을 지도하는 코치가 됐습니다. 꿈나무 코치 2년 하고요. 이후 국가대표 후보 팀인 상비군 선수들을 지도하는 중장거리 코치를 이어서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0년도에 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으로 맡아 현재까지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고요. 그러면서 국가대표 코치, 감독, 마라톤 기술위원장, 대한육상연맹 이사, 대한체육회 이사 등 관련된 일들을 쭉 해왔습니다.
-장환수 기자: 은퇴한 뒤에도 마라톤을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황영조 감독: 네, 저는 은퇴 이후에 현재까지 계속 현장에서 선수 지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한창 나이에 은퇴했지만 한 순간도 마라톤을 떠난 적 없어"
-장환수 기자: 이봉주 선수가 최근에 근육이 굳는 난치병을 앓았는데 이봉주 선수랑은 한 번씩 만나십니까.
황영조 감독: 이봉주 선수가 아주 사랑하는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갔다 왔고요. 봉주는 뭐 가끔 행사장에서도 만날 때도 있고, 마라톤 대회 때도 같이 게스트로 와서 만날 때도 있고요. 사실 이봉주 선수와 저하고 관계에 대해선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수도 있는데요. 이봉주 선수의 부인이 제 중학교 동창입니다. 저희 고향집에서 둘이 처음 만났어요.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결혼까지 하게 되죠. 저하고는 같이 운동을 했고, 보스톤 마라톤 한국 기록 세울 때도 이봉주가 같이 참가했습니다.
96년도에 제가 은퇴하면서 이봉주 선수가 제 뒤를 이어서 한국 마라톤을 끌어줬죠. 사람들이 저하고 이봉주 선수하고 안 친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봉주하고 저하고 안 친할 이유도 없고, 나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아주 좋은 친구로서 서로 잘될 수 있게끔 격려하고 그런 친구입니다. 제가 골드클래스라는 유튜브를 여기서 얘기하기는 좀 뭐합니다만 러닝을 많이 알리고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봉주도 골드클래스 채널에 불러 저희의 이야기를 좀 해야 되지 않겠나, 또 이렇게 사람들이 오해가 있는 부분은 좀 풀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장환수 기자: 이봉주 선수랑은 참 특별한 인연이군요. 우리 황 감독님이 없었으면 결혼을 못 하셨을 수도 있다는 농담이 나올 만하네요.
황영조 감독: 못하지는 않았겠지만 저로 인해서 그렇게 또 인연이 돼가지고 결혼까지 하게 되고 또 같은 팀에서 운동도 했고 한솥밥도 먹었지요.
-장환수 기자: 코오롱 말씀이죠.
황영조 감독: 그렇습니다. 저는 좀 일찍 시작해 일찍 떠났고, 이봉주는 오랜 시간 뛰면서 국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죠. 선수로서 많은 노력을 했고. 참 훌륭한 선수죠.
-장환수 기자: 최근 마라톤 열풍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데 지도자로서 청년들이나 아니면 또 우리 젊은 선수들에게 해줄 수 있는 팁이라는 게 있다면 엘리트와 순수 아마추어 동호인으로 나눠서 말씀해 주시죠.
황영조 감독: IMF 때 마라톤을 많은 사람들이 하게 되면서 붐이 일었는데 그때 실직하신 분들이 희망을 찾고자 마라톤을 선택해서 도전했죠. 그래서 당시엔 20대, 30대는 소수였고 40대, 50대가 많았고요. 최근엔 20대가 상당히 많습니다. 러닝은 우리 건강에 상당히 좋고,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아름다운 몸을 만들고 싶어 하죠. 가장 좋은 게 러닝 다이어트거든요. 러닝을 통한 다이어트가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지 않았느냐 하는 생각이고요.
러닝은 잘 뛰면 보약이 되는데 잘못 뛰면 독이 될 수도 있죠. 제대로 알고 러닝을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만 보고 뛰면 되는 심플한 운동인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운동이거든요.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잘 알고 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장환수 기자: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황 감독님한테 직접 문의해 보시면 되겠군요. 흔히들 마라톤을 인생에 비유하곤 합니다.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황영조 감독: 마라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인생에 비유하는데 제가 걸었던 마라톤이란 운동은 '전진'이었던 것 같아요. 한 발 한 발 나를 다스리고 좀 더 강한 나를 만들기 위해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멘탈을 계속 잡아나가야 되는 겁니다. 몸을 끌고 가는 것은 마음이잖아요. 정신이잖아요.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견디고 또 견디면서 가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제가 왜 빨리 은퇴했고, 그만두고 싶었느냐, 제 인생의 마라톤은 어땠느냐 하면 항상 불구덩이였어요. 산 사람을 불에다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엄청나게 고통스럽잖아요. 그런 고통을 감내할 때 뭔가 되는 거지, 그냥 쉽게 적당히 해서는 안 되는 거거든요. 젊은 친구들한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도 극한 상황을 견뎌낼 때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장환수 기자: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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