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예술
캐럴라인 캠벨 지음
황성연 옮김
21세기북스
1975년, 캄보디아를 장악한 폴 포트 정권은 ‘도시’라는 것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수도 프놈펜이 텅 비고, 시민들은 농촌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유사 이래 도시를 증오해 온 사람은 많았다. 그들은 도시의 사치와 타락, 부유함과 비참함을 조롱하고 비난해 왔다. 그러나 폴 포트처럼 과격한 해결책을 실행에 옮긴 사람은 없었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놀라고 감탄했다. 그는 베이징을 방문한 레주언에게 물었다. 베트남도 도시를 소개(疏開)할 수 있겠는가? 레주언은 결코 온건한 인물이 아니었으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했다. 마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그건 할 수 없어요.”
지금까지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도시 유적은 대략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상 올라가기도 힘들다. 비농업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잉여 농산물이 도시의 성립 조건인데, 이것은 1만 2천 년 전 신석기 혁명으로 농경이 시작된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도시는 처음부터 비생산적이며, 훗날 비난받았듯 기생적인 곳이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예술과 창의성, 그를 위한 자극과 상호작용” 면에서 그보다 나은 환경은 없었다.
저자 캐롤라인 캠벨(1973~)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미술사가로 현재 아일랜드 국립 미술관 관장이다. 이 책은 독특한 형식의 세계 미술사이다. 세계사의 각 시기별로 바톤 터치하듯 다른 도시로 넘어가면서 예술을 조명한다. 각 도시가 품은 예술이 초점이다. 예술이 없다면 도시는 의미가 없으며 세계사는 어느 정도는 예술가들의 창안이라는 것이 그의 솔직한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무척 고전적이지만 책의 구성은 진보적이다. 이 책에서 로마, 피렌체 등 미술사에 단골로 나오는 서구 도시는 6개뿐이다. 나머지 9개는 성경에 나오는 바빌론에서부터 아프리카 배냉, 남미의 콘크리트 도시 브라질리아까지 전 지구적으로 안배되었다. 앞으로 교양서에서 점점 익숙해질 경향일 것이다.
읽다 보면 이 책은 TV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는 쪽이 더 적합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해당 도시에 가서 모든 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설명한다고 상상하면 읽기가 쉬워지는 - 시도해 보시길 - 부분이 적지 않다. 아쉽게도 어떤 때는 도시가 하나의 장 제목에 불과하다. 설명이 그 공간적 한계를 자주 벗어나기 때문이다. 각 도시에 배정된 많지 않은 분량에 비해 다루는 내용이 넘치는 느낌이다. 주로 마무리에 반복되는, “그 작품은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는 서술은 좀 급하고 선언적이다.
이 책의 주제, ‘예술가가 도시에 남긴 영향’에 관한 탐구는 마지막 장인 ‘평양’에서 다소 수정되지 않을 수 없다. 앞 장 ‘브라질리아’의 주인공은 니마이어, 코스타 등의 건축가였다. 지도자가 아닌 개인의 이름이 창조자로 부각되는 일은 평양에서는 허락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대규모 군중을 동원한 집체 예술이며, 이는 위대한 지도자를 찬양하고 그 안에서 주민 모두 하나가 되는 제의이다.
물론 평양에는 건축과 기념비, 지하철역의 대형 벽화 같은 ‘예술’이 존재하며 저자는 그 교묘함과 유쾌함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치 고대 도시의 유적을 설명하는 것 같은 톤이 된다. 예술가 개인에 감정 이입할 길이 막혔으니 말이다. 평양은 현대적인 도시(“구소련의 주변 공화국 도시 느낌”)이자, 오웰이 예견한 디스토피아적 미래 도시이자, 역사를 뚫고 내려온 화석과 같은 전제 군주의 도시이다.
평양을 통해 이 책은 첫 장의 바빌론으로 원을 그리며 되돌아간다. 역사상 많은 도시들이 전제적 지배자가 스스로를 기념한다는 동기로 건설되었다. 그런 동기는 결국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훗날 그 도시가 얼마나 많은 예술을 소유했는지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