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초로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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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은 우리만의 민족적 운동에 그치지 않았고, 세계 비폭력 평화운동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초로 자리 잡으면서,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확산되던 약소민족들의 세계민족혁명(투쟁) 방식을 비폭력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깨우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큰 울림을 선사했단 평가를 받고 있다.
가깝게는 중국의 5·4운동 발발에서 멀게는 인도의 비폭력 운동 등에 영향을 줬다. 중국 현대사의 탄생점이라는 5·4운동이 3·1운동을 보면서 탄생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5·4운동의 핵심적 추진자들은 한국민족의 3·1운동을 격찬하고, 한국민족의 3·1운동으로부터 배울 것을 절규했다. 중국와 5·4운동이 한국민족의 3·1운동의 고취와 영향을 받은 것임을 증언하는 다수의 기록들이 남겨졌다.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에도 큰 불씨를 지폈다. 1919년 4월 5일 인도 독립운동의 대전환점을 이루기 시작한 ‘사타야 그라하 사브하’, 즉 ‘진리수호(眞理守護)운동’은 3·1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영국의 인도에 대한 식민지통치가 ‘간접통치’인 구조적 특징을 활용해 3·1운동의 비폭력투쟁 방법까지 채택해 급속히 성장시켰던 것이다.
당시, 열강의 압제 속에 있던 인도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긴밀한 연대감을 형성했다. 예컨대 3·1운동 이전에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의 하나인 라빈드라나드 타골(Rabindranath Tagore)은 ‘3·1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인 최남선의 요청을 받은 뒤 한국민족에 대한 연대의 표시로 ‘피정복자의 노래(Le Chant de la Vainctxe)’라는 송시(頌詩)를 최남선에게 보내 줬다.
라빈드라나드 타골은 또 3·1운동 10주년째인 1929년에도 3·1운동의 감명을 잊지 않고 ‘일찌기 아시의 황금시대에 등불의 하나이었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의 내용으로 한국을 노래하기도 했다.
3·1 운동은 특히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서방 강대국 등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1운동 이후 당시 일제의 신문 등 언론 통제를 물리치고 진상보도까지 이뤄내며 고배에서 발행됐던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 지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의 실패를 지적했고, 동경의 ‘저팬 애드버타이저’ 지는 수원 제암리의 학살사건을 상세히 밝혀 세계인들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한편, 3·1운동은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3·1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밖에도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시키면서 대한국민 국민들의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얻게 됐다.
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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