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만큼 논란도 화려하다…청소 알바 출신 ‘신데렐라 디바’

2025-08-15

한정호의 클래식 수퍼스타즈

2000년대 이후 세계 오페라 시장에서 ‘수퍼스타’라는 타이틀을 가장 자연스럽게 달고 다닌 인물은 단연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재학 시절 마린스키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청소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걸 극장장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듣고 발탁했다는 ‘신데렐라식 발굴담’은 2003년 도이치그라모폰(DG) 전속 계약 무렵 서방에 급속히 퍼졌다. DG 계약을 발판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간판 히로인에 오른 네트렙코는 2000년대 중반 이미 ‘글로벌 디바’로 자리매김했다.

‘네트렙코 출연작=매진’ 2000년대 공식

마리아 칼라스가 청각적 식별력을 극대화한 음색과 발성, 프레이징으로 당대의 청중을 사로잡았다면, 네트렙코는 ‘목소리의 드라마’를 현장에 선사하며 ‘21세기형 디바’로 위치했다. 2005년 서른넷의 네트렙코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라 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로 분해, 한 손에 술잔을 높이 들고 남자들을 희롱하는 연기로 ‘오페라의 비주얼 혁명’을 선도하기도 했다. 현대 오페라 연출이 요구하는 스타성·몰입도·전위성을 모두 갖춘 토털 패키지였다.

네트렙코가 만일 외모만 뛰어났다면 두세 시즌 만에 메이저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을 테지만, 사반세기에 가깝게 최정상 행보를 가능케 한 힘은, 목소리 안에 캐릭터의 정체성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특유의 기술에 있다. 특히 베르디 연작에서 보이는 배음의 울림이나 어질리티(순발력)는 경쟁 소프라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네트렙코만의 역량이다. 미학적으로 보면 네트렙코의 오페라 해석은 ‘감정의 직선적 분출’에 방점이 찍힌다. 카라얀 시대에는 가수의 역량을 지휘자가 조각으로 완성한 반면, 네트렙코는 복잡한 해독 없이 캐릭터 심리를 본인이 즉각적으로 전달한다. 올드팬에게는 극장에서 오페라를 경험해야 한다는 고전적 관람 가치를 상기시키고, 유입 관객에겐 새로운 감상 관점을 전한다. 표정과 제스처를 ‘확장된 악보’로 읽어내는 스타일이 오늘날 성악계 전반으로 확산된 흐름 중심에 네트렙코가 있다.

2000년대 뉴욕 메트, 밀라노 라 스칼라, 빈 슈타츠오퍼, 영국 로열 오페라, 파리 오페라에선 ‘네트렙코 출연작=매진’이 공식이었다. 메이저 극장들은 최소 다섯 시즌 앞서 향후 출연작을 조율했고, 네트렙코의 스케줄 확보가 곧 극장장의 역량을 입증하는 척도였다. 30대 시절 ‘에스프레소와 크림’이 어우러진 듯한 리릭한 부드러움을 자랑하던 보이스는 40대에 접어들며 변곡점을 맞았다. 사실 비올레타, 미미(라 보엠), 엘비라(청교도), 아미나(몽유병의 여인)로 활약하던 시기에도, 2010년대 중반이면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에 어울리는 중저음 드라마틱 소프라노로 이행하리란 전망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시기가 되자, 예고했던 배역에 목소리가 부합하지 않아 ‘건강상 이유’ 명목의 취소가 잦아졌다. 동시에 디바의 숙명처럼 따라붙던 다이어트 압박을 벗어던진 듯한 그녀의 외모 변화는, 네트렙코의 화려한 비주얼을 기대했던 관객층 일부를 극장에서 멀어지게 했다.

2010년대 중반 네트렙코는 ‘은으로 감싼 강철’로 전략을 바꿨다. 중저음역에서 벨벳 질감의 음색에 광택을 넣는 기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고음에선 화려한 파사조에 공을 들이고,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프레이즈에 유려함을 더했다. 시네마틱 리얼리즘에 어울렸던 외양을 버리고 전통 오페라의 살롱적 우아함에 다가갔다. 벨칸토·베리스모·러시아 레퍼토리의 경계를 자신만의 경로로 횡단하면서 이에 호응하는 메이저 오페라극장만 골라 다녔다. 내한 공연도 정점에서 내려와 제2의 전성기를 모색할 때 이뤄졌다. 2016, 2017년 연이은 방한은 당시 남편인 유시프 에이바조프와 함께 하는 듀오 콘서트를 위해서였다.

네트렙코의 사생활은 늘 대중의 관심을 모은다. 첫 결혼은 베이스 바리톤 어윈 슈롯과 했고, 아들 티아고를 낳았다. 2015년엔 아제르바이잔 출신 테너 에이바조프와 재혼했다. 두 사람은 ‘클래식 파워 커플’로 활약했으나 2024년 6월 결혼 생활을 정리했다. 에이바조프는 결별 사유로 불임 문제를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2022년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선 ‘아이다’ 배역의 흑인 분장에 대해 논란이 일자 아예 태닝샵에서 몸을 그을리는 사진을 올리면서 논란을 부추기기도 했다. 올 8월 출연 예정이던 베로나 원형극장 ‘아이다’를 취소하고 해변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니 네티즌은 오젬픽 주사 의혹을 거론하고 네트렙코는 발끈한다.

이런 유형의 디바는 클래식 음악계에서 쉽게 ‘명가수’로 불리기 어렵다. 커리어 중반 이후 뚜렷하게 드러난 기량 기복, 배역 해석의 비일관성, 후대가 참고할 만한 결정적 레코딩의 부재가 그 이유다. 모든 배역이 ‘네트렙코답게’ 들린다는 점은 대중적 스타성으로는 강점이지만, 명가수의 기준에서는 한계다. 모차르트에서 베르디, 차이콥스키와 푸치니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신의 음색과 제스처로 일관되게 채색했고, 캐릭터별 해석의 차별성은 희석됐다.

네트렙코의 오페라 무대는 흥행과 화제성을 보장했지만, 음악사에 ‘표준’으로 남을 만한 장면은 드물다. 오늘날 제작의 주도권이 극장과 연출가에 집중되는 환경에서, 네트렙코는 흥행 보증수표이지만 배역 해석을 통해 오페라 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칼라스가 아리아의 절창으로 오페라를 예술 담론의 장으로 확장했다면, 네트렙코는 오페라를 대중문화의 소비 플랫폼으로 끌어왔다. 소셜미디어 조회수와 틱톡 영상이 칼라스·레나타 테발디 시대의 비평 문단보다 무겁게 작동하는 오늘, 네트렙코는 가장 ‘시장 친화적인 브랜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네트렙코의 예술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성악가로서 그녀는 서방 사회에서 ‘정치적 입장 표명’을 강하게 요구받았고, 한참 뒤늦게야 “전쟁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언은 러시아 내 애국 진영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 국영 언론이 ‘배신자’로 규정할 만큼 정치적 파장은 컸다. 러시아 정부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네트렙코 소유 주택의 불법 임대를 거론하며 망신주기에 애쓰고 있다.

정치적 발언, 사생활 노출도 브랜드화

서방에서의 상황은 단순하지 않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네트렙코의 발언이 ‘충분히 강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전히 출연을 불허하고 있고, 그 배경에는 극장장 피터 겔브의 부인이자 우크라이나 자유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인 케리-린 윌슨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제2의 전성기를 모색하던 시점에서 터진 러-우 전쟁은 네트렙코를 예술적 평가의 장에서 정치·문화 이슈의 아이콘으로 전환시키는 분기점이 됐다. 전쟁 논란은 오페라 무대를 좁혔지만, 동시에 ‘검열당한 스타’라는 브랜드 가치를 확장시켰다. 베를린, 파리에서의 복귀 무대는 단순한 전막 공연이 아니라 극장 안팎의 긴장과 드라마를 품은 사회적 이벤트가 되었고, 네트렙코 측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 전쟁 이슈를 놓지 않았다. 과거 성악가의 대중성은 기량·레퍼토리·비주얼·미디어 노출의 합으로 평가됐으나, 네트렙코는 여기에 ‘정치적 입장’을 새로운 변수로 끌어들인 것이다.

결국 기량 면에서 제2의 전성기 전략이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더라도, 논란과 복귀, 거부와 환영이 반복되는 서사가 지속되는 한 네트렙코의 이름은 뉴욕타임스 등 유력 언론의 헤드라인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대 위 아리아’가 아닌 ‘무대 밖 서사’로 디바의 사회적 명성을 유지하는 새로운 생존 모델이다.

네트렙코의 커리어는 쓰리 테너나 요나스 카우프만처럼 ‘성공-전성기-위기-재편’이라는 단선적 구조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정치적 발언과 사생활 노출, 논란을 브랜드 자산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결합해 오늘의 ‘셀럽 네트렙코’를 만들었다. 그녀의 현재는 단순히 푸틴과의 관계로 얼룩진 러시아 소프라노의 흥망사가 아니라, 세계 오페라 시장이 지닌 모순과 복합성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네트렙코는 ‘기량이 내려온 디바’가 아니라 ‘논란으로 살아남은 디바’이며, 바로 이 지점에서 2020년대 후반에도 ‘클래식 수퍼스타스’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한정호 공연평론가·에투알클래식 대표. 런던 시티대 대학원 문화정책 매니지먼트 석사. 발레리나 박세은, 축구인 박지성 등 예술 체육계 명사의 에이전시와 문화정책 자문을 담당하는 에투알클래식 대표를 맡고 있다. 월간 객석, 일본 오케스트라연맹에서 일했고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다양성위원회 민간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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