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6일 교육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중계를 보던 내내 2006년 겨울, 고려대를 취재하던 때 기억이 떠올랐다. 그해 12월 이필상 고려대 총장이 취임했다. ‘1세대 시민운동가’로 신망받던 학자인 데다 국가대표 격인 명문사학이 타교 출신(서울대 졸업)을 총장에 선임했다는 점 때문에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취임 닷새 만에 반전이 일어났다. 평교수 시절 발표한 학술지 논문 5~8편에 표절 의혹이 제기된 거다. 교수의회의 진상조사, 신임투표 등으로 진통을 겪다가 결국 취임 58일 만에 사퇴했다.
황우석 사태 20년…난맥상 여전
대학 내 검증 시스템 정착 요원
공정성·투명성 제고 대책 절실
기자 눈에 비친 ‘지역거점국립대 첫 여성 총장’(이진숙 전 충남대 총장)의 표절 논란은 18년 전 ‘서울대 출신 첫 고려대 총장’의 중도하차 때 목격했던 장면의 데자뷔나 다름없었다. 두 총장 모두 제자 학위 논문과 ‘판박이’란 비판을 받는 논문에 이름 올렸다. ‘역효과를 초레하고’(‘초래하고’의 오기·이진숙), ‘영향을 나타고’(‘나타내고’·이필상)처럼 오·탈자까지 옮겼다는 점, 논란이 커지자 제자들이 스승을 옹호하려 호소문을 내고 기자회견에 나섰다는 점도 닮은꼴이다.
해명의 논리도 비슷했다. 이진숙 전 총장은 ‘이공계의 특수성’을 들어 “(제가) 제1 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논문에 대한 기여가 제자보다 커 문제없단 주장인데, 이필상 전 총장이 “학생에게 주제, 방향을 제시하고 자료까지 제공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던 대목과 유사하다. 답답했던 결말마저 판박이였다. 한참 동안 갑론을박이 진행됐지만, 딱 부러진 판정이나 결론 없이 당사자의 낙마로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지명 철회된 장관 후보자, 퇴임 총장을 굳이 소환한 건 20년 가까이 되풀이되고 있는 연구윤리 문제의 난맥상을 되돌아보자는 뜻에서다. 2005년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을 계기로, 국내 대학·학계에 미처 정착되지 못했던 연구윤리를 바로 세우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듬해 김병준 교육 부총리가 낙마하는 등 논문 표절 여부가 공직자 검증의 잣대로 자리잡으면서 이런 분위기에 힘을 더했다.
정부도 부랴부랴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대학·연구기관에 규정 제정과 준수를 요구했다. 그 결과 이젠 외형상으론 한국도 ‘학술 선진국’에 못지않은 규정·제도를 갖추게 됐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2023년 전국 4년제 대학 180곳 중 관련 규정을 마련한 대학이 176곳(97.8%)에 이른다. 연구자·교원에게 연구윤리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 ‘카피킬러’ 같은 표절예방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대학 비율도 각각 90% 이상이다.
그러나 정작 연구 부정행위를 검증하는 대학 내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각 대학은 자체 규정에 따라 구성한 ‘연구진실성위원회’를 통해 제보를 접수·조사하고 연구 부정 여부를 판정한다. 그런데 제도 도입 15년이 지났지만 ‘연구윤리 법정’ 역할을 제대로 한다고 보긴 어렵다. 형식적인 운영, 전문성·투명성 부족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훨씬 크단 얘기다.
특히 위원 상당수가 보직 교수 등 학내 인사로 구성돼, 총장 입김이나 학내 이해관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2021년 대선 정국에서 제기된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의혹이 최근에야 판가름난 것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다. 숙명여대는 2022년 2월 김 여사의 석사 논문 검증에 착수했지만, 결과를 확정·통보한 것은 올해 초였다. ‘진상 규명’을 공약한 총장의 취임 후 연구진실성위원들이 대거 교체된 뒤에야 결론 났다.
과도한 비밀주의도 문제다. 2022년 8월 ‘Yuji논문’을 포함해 김 여사의 논문 4편을 검증한 국민대 연구윤리위는 ‘연구부정 없음’이란 판정 결과를 밝히면서 A4용지 2장 반 정도의 자료만 공개해 ‘깜깜이 판정’이란 비판을 자초했다. 그나마 국민적 관심사안이라 이 정도였지, 대다수 대학은 ‘표절 아님’ 판정일 땐 결론만 간단히 밝힐 뿐 상세 사유나 근거 등을 공개하지 않는다. 위원 명단은 조사 중은 물론 판정 후에도 밝히지 않는데, 제보자 입장에선 누가 무슨 근거로 판단했는지 알 수 없어 판정에 승복하기 쉽지 않다. 청문회 당시 이진숙 전 총장이 총장 후보 시절 학교 윤리위의 논문 검증을 통과했다고 했지만, 이런 불신의 구조 때문에 그리 도움되지 않았다.
표절 같은 연구부정이 용인되면 창의적 연구가 빛을 잃고, 젊은 연구자의 의욕을 꺾어 국가의 연구 경쟁력마저 갉아먹는다. 국민을 실망시키는 고위공직자·대학총장 낙마의 ‘흑역사’ 역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대학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연구윤리 검증 시스템의 공정성·투명성을 끌어올릴 대책을 마련하고 실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