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웨이터 50년

처음은 누구나 어렵죠. 약 100년 전, 젓가락 아닌 포크를 처음 들어본 경성 사람들 역시 양식이 어려웠습니다. 데이트를 하러 양식당에 온 커플 중 한 명이 “메뉴를 달라”고 하자, 요리 이름인 줄 알고 다른 이가 “나도 메뉴로 들겠어요”라고 하기도 했다지요. 양식당에 처음 방문한 이가 부하들 앞에서 손 씻는 물을 원샷한 경우도 있었고요. 한국인 1세대 웨이터인 이중일씨가 전하는 일화들입니다.
웨이터 입장에서도 에티켓을 숙지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고 해요. 뜨거운 커피를 총독부 고위 관리 옷에 확 쏟아버린 웨이터도 있었답니다. 이중일씨가 은퇴 후 1971년 중앙일보에 기록했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의 보물 상자를 꺼내 2025년 맛있게 한 상 차렸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재미와 의미를 두루 갖춘 이야기들, 핑거볼의 유래와 에티켓 쏠쏠 정보까지 더해서 내어드립니다. 일본인 고위 관리에게 커피를 쏟은 조선인 웨이터는 어떻게 되었을지, 읽어 보세요.
사실 확인을 위해 다양한 관련 서적과 사료를 참고했습니다. 보완해 추가한 내용은 파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참고문헌 목록은 기사 끝에 적시했습니다.
그 옛날, 무성영화 변사의 목소리처럼 AI로 생성한 오디오로도 기사를 ‘들으실’ 수도 있어요. 기사 중간에 있는 오디오 버튼을 살짝 눌러 주세요. 이중일씨의 이야기는 매주 월요일 찾아옵니다.

중앙일보 1971년 3월 8일자
나는 1933년 2월에야 정식 웨이터가 됐다. 안동·신의주뿐 아니라 청진·나진·부산 등을 오르내리며 양식을 서브(serve)해 왔다. 견습 딱지는 떨어졌지만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일본인 직원은 일급을 2원씩 받았는데 나는 한국 사람이라고 하여 절반 정도밖에 받질 못했다. 간혹 실수가 있으면 ‘조센징’으로 몰아세우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복받치는 설움을 꾹꾹 참아야 했다.
당시 웨이터 장(長)은 일본인이었고, 그 바로 아래에 영어를 잘했던 한국인 강흥선씨가 있었다. 웨이터 장은 웨이터 세계에선 대통령 격이라, 서슬이 여간 시퍼렇지 않았다. 강씨는 내가 일급 50전을 받을 때 1원50전을 받았고, 팁으로 받는 금액은 100원이 넘었다. 그는 주 1회 강좌를 벌였는데, “고객들의 개성은 백인 백색이니, 개성에 맞춰 가려운 곳을 긁어줘야 한다”거나 “손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 즉각 대응해야 한다”고 역설하곤 했다.

디너를 먹기 전엔 서양식으로 칵테일을 마셨는데, 당시 유행하던 식전주로는 맨해튼과 마티니가 대유행이었다. 여성 고객들은 밀스라는 프랑스 포도주를 찾는 일도 많았다. 어떤 이들은 아예 한 병을 주문해 얼음을 채운 통에 병을 넣어두고 마셨다. 웨이터들은 손님 등 뒤 석 자 세 치(약 1m) 물러서 있다가 손님의 잔이 빌락 말락 하기가 무섭게 잔을 채웠다.
총독 관저나 정무총감 저택 등 거물급 파티가 열리면 뻔질나게 불려가서 출장 서비스를 해 왔다. 서슬 퍼런 총독이나 정무총감 저택이었지만 웨이터들은 프리 패스였다. 해프닝도 많았다. 한 번은 조선호텔에서 총독이 압록강 수풍댐과 흥남 질소비료 공장, 반도호텔 등을 지은 노구치 시타가후(野口遵)의 환영연을 벌였는데, 분위기가 어마어마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웨이터 한 명이 커피를 서브하던 중 축사를 하려 일어나던 총독의 뒤통수에 뜨거운 커피를 끼얹은 사건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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