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연예뉴스 | 강선애 기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6일 방송된 '이름 없는 기술자'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가수 전효성, 배우 박은석, 아나운서 최기환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의문의 한 남자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지명수배자야. 어찌나 신출귀몰한지, 도주 기간동안 투입된 인원만 누적 389만명. 경찰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난리였어.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보다 4배나 더 긴 세월동안 도망 다닌 지명수배자. 바로 이 사람이야.
키 170cm에 솥뚜껑처럼 큰 손을 지닌 남자. 그리고 이건, 이 수배자가 사용했던 물건이야.
신발, 머리빗, 칫솔, 면도기. 그는 이 서류가방에 이렇게 운동화와 세면도구를 넣어 다녔대. 이 수배자, 어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일까? 사람들은 그를 '이름 없는 기술자'라고 불렀어. 어떤 한 분야에서만큼은 국내 최고 기술자라는데,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가 잘했다는 건, 어떤 분야였을까? 그리고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전 국민이 그를 찾아 다닌 걸까? 지금부터, 그 이름 없는 기술자를 잡으러 가볼게.
때는 1978년 2월. 서해 강화도 인근의 작은 섬마을이야. 22살 박남일 씨는 어머니, 15살 터울의 형과 같이 살고 있었어. 이 나이차가 많이 나는 형은, 남일 씨에게 슈퍼맨이었어.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집이 빚더미에 앉았는데, 형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그 빚을 다 갚았거든.
그러던 어느 날, 남일 씨네 가족은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었어. 새벽 1시쯤 됐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남일 씨네 대문을 거칠게 두들겨. 남일 씨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게.
"세 명이 한집에 자고 있는데, 새벽 1시에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 집을 다 뒤져보고 '박남훈 씨(형) 갑시다' 그래서, 그때 가면서 어머니랑 저를 보고 막 울면서. '왜 너희는 누군데 나를 끌고 가냐?'고 그렇게 막 울면서 소리를 했습니다. 형님이."
-박남일, 당시 22세
다짜고짜 괴한들이 들이닥쳐서 형을 끌고 가버렸어. 남일 씨는 그 괴한들 중 특히 한 남자가 인상깊었대.
"한 80~90kg 정도 나가는, 저처럼 덩치가 컸었고. 그 손도 굉장히 컸었고, 발도 아주 굉장히 큰 분이었습니다."
-박남일, 당시 22세
남일 씨의 형을 끌고 간 사람은, 아까 그 지명수배자 속 인물과 동일인이야.
그리고 이번엔 1982년, 전북 김제에 진봉 지서라는 곳이야. 지금으로 말하면, 진봉 지구대. 이 진봉 지서로 한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그는 자기 아버지가 납치된 거 같다고 말했어. 실종 신고를 한 사람은 20살 최봉준 씨. 평소 건강이 나빠 집에 누워만 계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거야.
"저는 그때 축구대회가 8월 15일 광복 기념으로 해서 지역마다 축구대회가 있어서 그쪽에서 연습하고 저녁에는 술도 한잔씩 하고 헤어지고 이런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그 다음날 아침에 들어와 보니까 아버님이 안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동생한테 물어보니까, 꿈결에 누군가 나타나서 아버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같이 따라나갔다는 그런 기억이 있다는 거예요 동생이."
-최봉준, 당시 나이 20살
얼마 후, 서울에서 경찰들이 찾아왔는데, 봉준 씨 아버지를 직접 찾아주겠다는 거야.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든 봉준 씨 가족들은 서울 경찰들에게 방을 내어주고, 매 끼니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 대접했어. 하지만 그 서울 경찰들은 열흘동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채 다시 서울로 돌아갔어. 그런데 얼마 뒤, 봉준 씨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어.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자기네들이 연행해 갔으면 연행해 갔다고 해야지. 연행해 놓고도 안 해간 척하면서 가족들 동태 살피고 했다는 게. 너무나도 배신감, 억울하고.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보면 원수인데. 그런 사람을 밥까지 차려주고 잘 찾아달라고…"
-최봉준, 당시 나이 20살
알고보니 아버지를 찾아주겠다던 그 서울 경찰들이, 아버지를 납치한 사람들이었던 거야. 그 경찰들 중 딱 한사람, 봉준 씨의 기억에 각인된 남자가 있어. 다른 사람보다 손이 크고 두꺼웠어.
"175cm 정도 그 정도 키에, 손이 좀 두꺼웠어요."
-최봉준, 당시 나이 20살
남일 씨의 형을 납치한 남자와 동일 인물이자, '이름 없는 기술자'라 불리는 사람. 그런데 이 사람의 직업, 경찰이라잖아? 이 지명수배범은, 바로 대한민국 경찰이었어.
그와 질긴 악연으로 엮인 또 다른 사람이 있어. 1985년 경기도 하남시의 한 다방. 35살 김성학 씨는 마음이 조급해. 아는 사람이 보자고 해서 잠깐 나왔는데, 마음은 온통 집에 가 있어. 집에서 갖 돌이 된 딸이 기다리고 있거든. 옹알이 하고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인데 어찌나 귀여운지. 성학 씨는 늦둥이 딸 보는 재미에 푹 빠진 '딸 바보'였어. 성학 씨가 얼른 집에 갈 생각에 부랴부랴 다방을 나서는데 갑자기, 누군가 성학 씨를 붙잡아.
"이제 얼른 차 마시고 나오는데.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 앞에 차가 딱 막아져 있더라고요. 뒷문이 열려 있고. 그리고 위에 계단에 두 사람이 딱 서있는데. 내 팔을 우선 딱 잡아 꺾어서 저를 뒷자리에 딱 싣더라고요."
-김성학, 당시 나이 35세
그렇게 한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한 남자가 성학 씨를 기다리고 있어.
"그 책상 앞에 의자에 앉아서 사과를 손으로 쪼개더라고요. 박살을 내더라고. 자기한테 걸려서 절대 온전히 나간 놈이 없다. 나한테 걸리면 절대 빠져 못 나간다. 그러니 너, 솔직하게 처음부터 다 얘기해라."
-김성학, 당시 나이 35세
이 남자, 손이 솥뚜껑처럼 큰, 바로 남일 씨의 형, 봉준 씨의 아버지를 끌고 갔던 그 경찰이야. 대체 김성학 씨에게 뭘 솔직하게 말하라고 하는 걸까? 몰라. 성학 씨도 그가 하는 말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 전혀 감이 안 와. 그래서, '난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어. 그랬더니 그 남자의 반응은 이랬어.
"그래? 알았어. 거기 칠성판 가져와."
'칠성판'은 관 바닥에 까는 널빤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 곳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였어. 성학 씨가 당시 봤던 칠성판을 직접 그려봤어.
"이거는 군인들 1인용 침대 같은 거예요. 주전자를 그리는 이유는, 거기다가 물을 부어요. 그때 제가 '아, 이거 전기 고문을 하는구나' 알겠더라고."
-김성학, 당시 나이 35살
칠성판에 있는 벨트로 사람의 몸을 결박해. 그리고 양 엄지발가락에 전선을 연결하고 전기를 흘려 보냈어. 심지어 전기가 잘 흐르도록 주전자로 물을 부었대.
"전기 고문을 내가 6번을 받았는데, 전기 고문을 받으면 그 악취 냄새가 노린내가, 자기네들도 못 맡으니까 거의 30분 만에 교대를 해요. 그때 그 마음은 누구도 모를 거예요. 세상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을. 그런 공권력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세상에 아무리 내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놈이래도…"
-김성학, 당시 나이 35세
전기 충격으로 성학 씨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서, 벨트가 다 터질 정도였대. 이 남자의 별명은 '이름 없는 기술자'. 사실 별명이 하나 더 있어. 바로, '고문 기술자'. 대한민국을 뒤흔든 공개수배범이자, 고문 경찰. 그는 바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었어.
▲ 고문 기술자 이근안
과거 독재정권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재야 인사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찰에 고문기술자가 있다", "이름 없는 기술자를 조심해"라는 말이 돌았어.
"자기 말로 볼펜 고문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볼펜 심문이라고. 삼척 간첩단 사건도 내가 볼펜 한 자루로 해결한 사람이다.."
-이수일, 민투,민학련사건 고문 피해자
"이근안 씨 말이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3개월 뒤에 죽일 수도 있고 6개월 뒤에 죽일 수도 있고. 몸을 그렇게 만들어 놓는다.
-김명인, 문화평론가, 무림 사건 고문 피해자
"엄지발가락에다가 수건을 봉해놓고 집게를 물리더라고요. 양 엄지벌가락에다가. 이근안은 침대에 앉아서 (전기 스위치를) 이렇게 끼릭끼릭 돌리는 거예요. 그것을 이렇게 돌릴 때까지 내 몸에 전기가 들어와서 이렇게 할 거 아닙니까. 이근안은 그걸 보면서 즐기는 사람이었어요."
-양승조, 학림사건 고문 피해자
전기고문은 전기가 흐르는 시간과 강도를 철저하게 계산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근안은 그 어떤 외상도 남기지 않으며, 죽을 만큼 아프지만, 절대 죽지 않는 고통을 줬어. 오죽하면 동료 경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대.
"한번은 모 경찰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문을 탁 차고 들어오면서 '형님 나 저거 못 보겠어' 라며 이근안이 고문하는 것에 대해 정색을 하면서 말을 하더군요. 이근안은 검사도 겁 먹었다니까. 사람을 워낙 조져놔서. 그 사람은 어디에서도 조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여러가지 수사 장비를 가지고 다닙니다. 그 장비에 손을 대면 큰일납니다. 고문할 때도 절대 다른 사람이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당시 이근안 동료
게다가 이근안은 전국으로 출장 고문을 다니기도 했어. 처음에 봤던 가방. 바로 이근안이 출장 고문을 다닐 때 가지고 다니던 거야. 조사실에 들어서면 운동화로 갈아 신고, 장비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대. 그렇게 수많은 민주화 열사들이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어.
그런데 맨처음에 이근안에게 끌려갔던 세 사람은, 왜 잡아갔던 걸까? 그 사람들은, 민주화 운동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이었어. 나이도, 사는 지역도, 끌려간 시기도 전부 달라. 남일 씨의 형은 1978년 강화도 인근 섬에서, 봉준 씨 아버지는 1982년 전북 김제에서, 성학 씨는 1985년 경기도 하남시에서 끌려갔어. 이 사람들을 왜 잡아갔던 걸까? 시간을 앞으로 돌려볼게.
1970년. 이근안은 32살의 나이에 경찰이 됐어. 당시로는 좀 늦은 나이지. 그래서 그런지,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라.
"이근안은 별명이 '뚱', '곰'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할 때는 무식하게 하고, 윗사람이 시키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하므로 잘 풀리지 않는 사건에는 소속을 불문하고 이근안을 붙일 정도로 윗사람들로부터 신임을 받았습니다."
- 당시 이근안 동료들
그런 이근안이 얼마 뒤, 간첩을 잡는 일을 하는 '대공분실'에 지원해. '대공'은 공산주의를 상대한다는 뜻이야. 경찰 조직에서는 남파간첩을 잡는 조직이지. 당시 대공분실의 위세는 어마어마했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야. 심지어 간첩을 잡으면 즉시 1계급 특진이야.
얼마 뒤 경기도 경찰청 대공분실로 발령 받은 이근안. 간첩을 잡겠다고, 엿 장수나 책 장수로 변장까지 해가며 탐문 수사를 했어. 그러던 어느날 이근안은 사건 하나를 발견해.
"지난달 29일 강화도 앞바다 휴전선 부근 갯벌에서 조개잡이를 하다가 북괴 무장병들에게 무더기로 납북돼 갔던 어민 선원 112명 중 104명이 20일 북괴 측에 의해 돌연 송환되어 피랍된 지 만 22일 만에 자유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서해 비무장지대에 있는 함박도 갯벌에서 어민들이 무더기로 북에 끌려갔다가 20여일 만에 대부분 귀환한, 오래된 사건이야. 이근안은 이 사건이 간첩의 소행이라 생각했어.
"함박도 조개잡이 납북 사건은 계획적인 사건으로 예의, 분석, 검토하여 간첩을 색출하여야 했음에도 전혀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참으로 한심스러웠다. 뒤늦게나마 이 사건을 파헤쳐야 한다고 결단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이근안
그래서 이근안은 납북됐다가 풀려난 어민들을 조사하게 시작해. 그 중에는 박남선이란 사람도 있었어.
"함박도 이런 데가 조개가 많기 때문에. 우리 마을뿐 아니라 볼음도, 미법도, 서검도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가고 했던 그런 사건인데. 아마 박남선 씨도 거기에 갔었다가 그렇게 된 걸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이근안이가 박남선을 조사하면서 가까운 친척이 6촌이기 때문에 저희 형님을 연행해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남일, 당시 나이 22살
1971년, 동해안에선 오징어잡이 어선이 납북된 적이 있었어. 20여명의 선원들이 북에 피랍됐다가 1년여 만에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어. 그 선원들 중에는, 딸바보 아빠 김성학 씨도 있었어. 그런데 14년 뒤에 어느날, 갑자기 이근안이 그를 간첩이라며 잡아간 거야. 국가기밀을 북에 제공했다는 혐의로. 그리고 아버지가 끌려간 봉준 씨. 그의 아버지 역시 과거에 북에 납북된 적이 있었어.
이제 세 사람의 공통점, 이제 알겠지? 본인 혹은 가족이 북에 납북된 적 있다는 이유로, 이근안의 표적이 된 거야. 심지어 영장도 없는, 불법 체포였어. 근데 당시 북에 납북된 일이 얼마나 됐을까?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무려 3700여명. 과거에는 바다에 남과 북의 경계가 모호해서, 어민들이 북한에 피랍된 적이 많았다고 해. 근데 북한에 다녀온 것만으로 그들을 다 간첩으로 몰아간 거야.
"소위 말해서 북한에 다녀온 어부들은 그냥 그 자체로 나중에 그 북한과 연계됐다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일 정도로 쉽게 간첩으로 만들 수 있는 늘 취약한 대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어렵고 학력이 굉장히 낮은 경우들이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곳에 위치해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사실 노리는 건 가장 쉬운 일인거죠."
-변상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근데 잡혀간 세 사람, 간첩이라는 증거가 나왔어. 그 증거는 바로 '자백'. 물론 당연히 처음엔 다들 부인했지. 하지만 이근안의 심문을 받고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돼. 이근안의 잔인한 고문 때문에. 근데 고문보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게 있었대.
"그 칠성판이라는 그런 데에서는 두려움이 있는데, 그런 거는 기본, 그런데 저기서 미치는게, 저기서 형의 고문 소리가 들린다는 거야. 형의 목소리가 그렇게 막 가슴이 찢어지더래. 내가 당하는 것보다 내 형의 고문 소리가 저기에서 들리는 게."
-최봉준, 당시 나이 20살
그럼 왜 가족까지 데려가 고문했을까? 사실 이근안이 찾은 증거는 자백만이 아니었어. 이근안은 자백을 뒷받침할 증거로, 가족들의 증언을 이용했어. 가족도 고문해서 거짓 증언을 하게 한 거야. 어느 정도였는지, 봉준 씨의 친척이 남긴 글이 있어.
"낙교가 하지도 않은 말을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거짓 증언한 자신이 미워서 가사를 돌보지 않고 술로 살다가, 그 후 낙교가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내가 간접살인자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음. 지금도 술에 젖으면 낙교를 생각하며 운다. 조카님 미안해. 당숙이 잘못했어."
거짓 자백과 거짓 증언만이 증거인 재판. 하지만 결과는 '유죄'가 나왔어. 심지어 사형이 선고된 사람도 있었어. 그렇게 봉준 씨네 가족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사촌들까지 줄줄이 다 간첩이 됐어. 마을의 성실한 이장이었고, 자상한 교사였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가족 간첩단'이 된 거야. 대공경찰 이근안은 이 사건들로 어마어마한 실적을 쌓고, 경사에서 경위로 특진해. 그리고 얼마 후 이 사람에게서 연락을 받아.
박처원. 대한민국 대공수사의 대부라 불리는 인물이야. 좋다는 자리는 다 마다하고, 오직 대공 수사만으로 치안감에 올랐거든. 박처원을 키운 선배 또한, 전설의 인물이야. 바로 노덕술.
일제 강점기에 '고문왕', '고문 귀신'이라 불린 친일 경찰이야. 이 사람의 기술은, 머리카락 뽑기, 혀 잡아당기기, 못 박기 등, 끔찍한 고문 기술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의 목숨을 빼앗았어. 박처원은 그 노덕술의 마지막 후계자였어.
이런 대공수사의 전설 박처원이 이근안에게 연락한 이유는? 새로 만든 부서에 베테랑 수사 인력들을 모으고 있었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
박처원은 조직과 의리를 가장 중요시 했어. 경찰에선 그들을, '박처원 사단'이라 불렀어. 이런 곳에 적임자로, 이근안이 딱이지.
"이 씨는 순경 시절 당시 박처원 치안본부 대공분실장의 안마사와 보디가드 노릇을 하다가 대공 업무에 뛰어들게 됐다는 것. 그때 실무진에서는 자질 부족과 개인적인 문제를 이유로 이 씨의 대공분실 근무를 반대했으나 박 실장이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이씨는 조서 작성을 깔끔히 하기 위해 붓글씨 학원에 다닐 정도로 남다른 집념을 보이며 일에 매달려 간첩 검거 등 많은 실적을 올렸다."
자신만의 노하우로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줄줄이 잡아들였어. 그가 고문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것도 바로 이 시기야. 각종 상도 휩쓸었어. 무려 16번의 표창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대통령 훈장도 있었어. 당시 분위기는 이랬어.
"북한이든 내려오라 이거야. 내려와야 우리 군인들 전과 올리고 훈장 타고 진급되고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느냐. 그놈들은 안 내려오면 좀 답답하죠. 그 어떤 면에서 군인들은 안 그래요? 경찰이나 좋은 기회, 금년도 좋은 기회 있을 거라 이거야. 공로를 세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전두환, 1984년 영빈관 오찬 격려사 중
전두환은 대통령 시절 누구보다 대공을 강조했어. 그 덕에 이근안은 거의 매년 특진을 하게 돼. 경찰들이 순경에서 경감까지 승진하는데 빨라도 20년이 걸린대. 근데 이근안은 14년이 걸렸어. 32살의 새내기 순경이었던 그가 간첩 잡는 고문 기술로, 40대 중반에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둔거야.
근데 아무리 독재정권이라 해도, 엄연히 법은 있었어. 경찰의 고문은 당연히 불법이야. 근데 왜 이근안은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그의 별명은 '이름 없는 기술자'. 이근안과 대공경찰들은, 절대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사장, 상무, 부장' 이런 식으로 호칭을 정해 불렀대. 피해자들이 나중에 이근안을 고소하고 싶어도, 이름을 몰라서 할 수 없었던 거야.
▲ 고문 기술자의 정체를 밝혀라
이근안이 이름을 숨기고 승승장구하던 1988년. 서울의 한 지하 다방이야. 저 안쪽 테이블에서 세 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 중 한 사람은 기자야. 이 기자는 다른 두 사람한테 아주 중요한 정보를 받기로 했어. 그 두 사람은 바로 이 사람들이야.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던, 김근태-인재근 부부야. 이 부부가 당시 기자에게 가져온 정보는 뭐였을까.
"저하고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하더라고요. 추적을 해봤다. 이름 모를 고문 기술자, 성명불상의 고문 기술자. 고문에 아주 도가 튼 그런 사람이 있다고. 김근태 씨가 그 사람한테 직접 당했고. 아마 감옥에서 나와서 김근태 씨가 이리저리 수소문했던 것 같아요."
-문학진, 당시 한겨례신문 기자
1985년, 민주화운동 청년 연합의 초대 의장이었던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름 모를 경찰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했어. 이후 김근태 의장은 재판에서 경찰의 고문 사실을 공개했고, 아내 인재근 씨 또한 미국 언론을 통해 고문 수사에 대해 전세계에 폭로했어. 이후 부부는 다른 고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고문 경찰에 대한 단서를 모아왔던 거야. 그럼, 이 고문 경찰의 이름을 알아냈을까?
"아… 그 이름이.. 이…근….한? 근데 얼굴을 보면 정확히 알 거 같은데."
정확한 이름은 모르지만, 사진만 구하면 그 경찰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 몰라. 문 기자는 곧장, 치안본부, 지금의 경찰청으로 갔어. 문 기자는 이 곳의 출입기자였거든. 곧바로 인사과로 간 문 기자는, 대공분실 인사카드를 보여달라 했어. 당시에는 출입기자들이 인사카드 열람이 가능했대. 과연 그곳에서 뭔가를 찾았을까?
찾았어. 김근태 의장이 말한 것과 비슷한 이름이, 인사카드에 있었대. 심지어 사진도 찾았어. 문 기자는 조용히 그 형사의 인사카드를 꺼냈어. 그리고 한발한발 복사기 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인사카드는 복사하면 안 된다'며 제지를 당했어. 그럼 무슨 방법이 있었을까?
"인사카드에 그 사람 서울 주소가 있더라고요. 제 후배 기자한테 동사무소를 가봐라. 가면 주민등록표가 쫙 있잖아요. 거기에 사진이 다 붙어있잖아요. 그래서 그 후배 기자가 사진을 동사무소 직원 몰래 떼어왔어요."
-문학진, 당시 한겨례신문 기자
우여곡절 끝에 그 경찰의 사진을 드디어 입수했어. 그리고 그 사진을 곧장 김근태 의장에게 보여줬지. 그 경찰이 맞았을까? 틀림없대. 다른 고문 피해자들도 이 얼굴이 확실하대. 그렇게 1988년 12월 21일, 마침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이름과 얼굴이 전국에 공개됐어.
"김근태 씨 족친 '이름 모를 전기고문 기술자' 경기도경 공안실장 이근안 씨"
이 기사가 나가고 반응은 어땠을까? 전국에서 전화가 빗발쳐.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던 거야.
"그때 이근안이라는 사람은 실제 고문을 담당하는 타작 반장이었습니다. 물고문을 하고, 허리 꺾기를 하고, 관절 꺾기를 하고."
-이태복, 고문 피해자
"욕조에가다 물을 가득 담아 놓고 뒤로 수갑을 채워놓고 이근안이 머리를 물속에 잡아넣는 거예요. 내 인생을 망친 놈입니다. 내 가정을 망치고."
-함주명, 고문 피해자
다른 언론사에도 이근안에 대한 기사가 쏟아졌어. 사태가 커지니 결국 검찰총장이 이근안에 대한 수사를 지시했어. 그럼, 이근안은 조사를 받았을까?
"이근안 경감이 잠적함에 따라, 치안본부와 경기도경의 협조를 얻어 소재 파악에 나서는 한편 법무부를 통해 출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당시 보도된 기사 中
이근안이 사라졌어. 이제 겨우 이름 석자를 알아냈는데, 수사는 시작도 못하고 그를 놓쳐버렸어. 일단 검찰이 수사 발표만 하고, 이근안을 바로 소환하지 않았어. 그러는 동안 자취를 감춰버린거야. 이제 이근안을 잡아야지. 경찰도 이근안에 대한 수배를 내렸어. 근데 좀 이상해
"현재 이 경감에 대해 내려진 수배의 내용이 '전기 고문'이라는 범죄 혐의자로서가 아니라 '직장 무단 이탈'이라는 사실에서도 이 사건을 보는 경찰의 입장을 느낄 수 있다."
이근안을 고문을 한 범죄 혐의가 아니라, 출근을 안한다는 이유로 수배를 내린 거야. 왜?
"그 당시에는 검찰에서 수배지시가 내려져서 경찰의 치부가 드러나고 있는 형편인데 그것을 그렇게 관심 깊게 관리하고 처리할 사항은 아니고."
-1988년 당시 치안본부장 녹취
'경찰이 제 식구 감싸는 거 아니냐' 전국민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졌어. 하지만 경찰은 이근안을 잡을 의지가 없어 보여.
▲ 대국민 경찰 수배
결국 이분들이 직접 이근안을 잡겠다고 나섰어.
민가협. 민주화실천 가족운동 협의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학생들의 어머니들이야. 이 어머니들이 직접 이근안을 잡겠다고 나선거야.
"옛날에 우리 자식들 민주화 운동 안 할 때는 오로지 내 자식이었는데 여기를 나가 보니까, 내 자식, 네 자식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런 못된 짓을 했으니까. 우리 눈에는 그냥 저승사자로 보였지. 그냥 아주 딱 잡히면 죽일 것 같이 미웠지. 이근안이 잡으려고 옷을 막 광목(천) 하얀 것 같은 거 그런 거에다가 옷에다 싸서 그런 걸 둘러 입고. 전철이고 버스고 전부, 오늘은 몇 사람은 이 버스, 몇 사람은 이 전철, 그렇게 홍보를 하고 다녔잖아요. 그랬는데, 힘 하나도 안 들었어요. 아무도 누가 힘들다고 한 사람은 없었어요."
-김정숙, 당시 민가협 회원
이게 당시 어머니들이 직접 만든 이근안 수배 전단이야. 현상금도 걸었어. 300만원. 이 돈을 어떻게 마련하셨을까? 공개 모금을 했어. 민가협 어머니들이 이근안을 현상수배한다는 소식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성금을 보내온 거야. 근데 참 아이러니하지? 범죄자를 수배하고 잡는 건 경찰이 할 일이야. 근데 시민들이 경찰을 수배하고, 직접 현상금까지 마련했어.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국민 경찰 수배. 이 전단을 보고 전국에서 제보가 쏟아졌어. 이근안, 찾았을까? 아니. 가는 곳마다 허탕이야. 민가협 어머니들이 전국으로 출동했지만, 이근안의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어. 그렇게 작은 단서도 찾지 못 한채. 야속한 세월만 계속 흘러
갖가지 소문만 무성한 채 이 씨는 10년 가까이 숨어 지냈어. 어느덧 1999년 10월. 이근안이 도주한지 벌써 11년이 흘렀어. 피해자들은 지치다 못해 애간장이 녹을 지경이야. 공소시효 때문에. 고문 등 가혹행위에 따른 형벌은 최대 징역 5년이고, 불법 체포나 감금은 최대 징역 7년이야. 징역 10년 미만의 범죄는, 공소시효 7년이야. 이 두가지 범죄를 가중처벌한다고 해도, 공소시효는 10년 밖에 되지 않아. 이근안이 도주한 지 어느덧 11년. 이미 대부분 피해자의 공소시효가 이미 다 끝나 버렸어. 딱 하나, 김근태 의장 고문사건이 남아있었는데, 그마저도 이미 두 달전에 공소시효가 끝났어. 피해자들의 심정은 타 들어갔지.
그런데, 얼마 뒤에 피해자들이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어. 이근안이 나타났거든.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죗값을 치르러 왔습니다."
이근안은 어떻게 잡힌 걸까? 1999년 10월 28일 오후 8시 30분. 검찰청으로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그리고 1층 당직실로 가더니, 직원에게 불쑥 주민등록증을 내밀어.
"내가 이근안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11년이나 종적을 감췄던 이근안이 자수하러 왔다는 거야. 김근태 당시 국회의원은 이근안의 자수가 모두 이 사람 덕이라고 말했어.
"어부로서 납북됐던 김성학이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이분도 고문을 통해서 조작 간첩이 됐었고, 그래서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져서 공소시효가 2013년인가 그렇게 늘어났고. 이게 아마 자수를 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김근태, 당시 국회의원
이근안의 공소시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야. 심지어 그가 자수한 게 전부 김성학 씨 때문이래.
이근안은 김성학 씨를 북한에 국가 기밀을 제공한 간첩으로 체포했어. 그런데 검찰에선 간첩죄를 빼고, 북한에 대한 찬양 고무 혐의로만 기소해. 간첩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는 거야. 이근안이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잡아냈지만, 그것만으로는 간첩죄로 처벌하기 부족하다고 본 거지. 그럼 북한에 대한 찬양 고무 혐의는? 그마저도 무죄가 나왔어. 이근안이 조작한 납북 어부 간첩 사건 중, 유일한 무죄 사건이었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성학 씨는 1987년도에 자신의 사건을 맡았던 16명의 수사관들을 전부 고발했어. 검찰의 수사 결과는 '기소유예'. 수사관에게 범죄 혐의가 있지만, 특별한 사유가 인정돼 기소하지 않겠다는 거야.
"그 사건이 나한테 불기소로 넘어온 게 어떤 내용으로 넘어왔느냐? 지금도 아니 한 자도 토시도 안 틀려. 대공 계통에 근무하는 조건 하에 국가 과잉 충성으로 인한 오인이었으므로 기소유예를 한다. 난 가방 끈이 짧아서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다…"
-김성학, 고문 피해자
공무를 집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니, 처벌하지 않겠다는 거야. 당연히 성학 씨는 검찰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어. 그래서 이번엔 검찰의 기소유예 처분에 대해, 법원에 다시 판단에 달라고 요청했어. 그걸 '재정신청'이라고 해. 근데 법원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어. 그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았어.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해인 1998년. 드디어 법원에서 재정을 결정해.
"서울고등법원 형사 2부는 오늘, 납북 송환 어부 김성학 씨가 고문에 못 이겨서 간첩으로 몰렸다며, 지난 87년 이근안 씨 등 당시 경찰관 16명을 상대로 낸 재정신청에서 이 씨 등 8명을 정식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게다가 이건, 15년의 재판 시효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걸 의미해. 결론은, 이근안이 법의 처벌을 받지 않으려면, 다시 15년을 더 도망다녀야 한다는 거야. 결국 이근안은 자수를 선택해. 그래서 김성학 씨 때문에 이근안을 잡았다는 말이 나온 거야.
결국 이름 없는 기술자의 이름 석자를 알아낸 것도, 현상금을 걸고 그를 수배한 것도, 끝내 자수하게 만든 것 역시, 모두 수사기관이 아닌 피해자들, 평범한 시민들이었어.
▲ 반전의 도피 생활
그럼 그동안 이근안은 어디에 숨어있던 걸까. 이근안은, 여기에 숨어 있었어.
본인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거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이근안 씨 집입니다. 이 씨는 주로 현관 오른쪽편 막내아들 방에서 지냈고, 수사관들이 찾아올 때마다 건너편 안방과 통해 있는 창고방으로 피신했습니다. 이 씨는 이 창고 방 안에서 천장과 책꽂이 사이 0.5평 비좁은 공간에 쭈그리고 앉은 채 빈 종이박스를 쓰고 몸을 숨겼습니다. 창고 방은 밖에서 열지 못하도록 잠금장치가 돼 있고, 유사시 도주할 수 있도록 밖으로 통하는 화장실과 연결돼 있습니다. 또 초인종을 눌렀을 경우 누군지 알 수 있도록 현관엔 비디오폰이 설치돼 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자수한 이근안은 작심한 듯, 검찰에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놨어. 자신이 잠적했던 건, 전부 박처원 치안감 때문이라고. 근데 박처원은 이근안에게 은인 같은 분이었잖아? 이근안은 이렇게 말했어.
"조직은 철저히 날 버렸다. 11년간 숨어 사는 동안 날 찾아온 건 바퀴벌레뿐이었다. 특히 내 직속상관이었던 그 분이 적어도 한 번은 날 찾을 줄 알았다. '고생했다'는 한마디 쯤은 해주실 줄 알았다. 박 단장 부인이 아내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몇 번 찾아온 적은 있다. 음식점에서 복어탕을 포장해 온 게 두 번, 집 앞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 한 접시를 권한 게 박 단장이 내게 보인 유일한 성의였다."
이근안은 자신에게 도주를 명령한 게 박처원이라 주장했어. 박처원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겼어. 하지만 박처원은 유죄판결을 받았어. 박처원 사단이 중요시한 건, 조직과 의리. 그 사람들에게 조직과 의리는 뭐였을까? 자신의 안녕을 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었을까.
▲ 어긋난 현실
그럼 이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는 어떤 판결이 내려졌을까. 유일하게 시효가 남은 김성학 씨 사건의 재판이 시작됐어. 1심 판결문이야.
"피고인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한 수사에 있어서 과거부터 불법 구금의 관행이나 다소의 폭행이 존재하였으므로 그 책임이 없다는 취지로 변소하나 이러한 사유는 이 사건 범행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다만 피고인이 범죄 수사의 의욕이 앞선 나머지 이 사건 범행에 이르렀고, 고령이며 비록 상당한 기간 도망하기는 하였지만 자수에 이른 점 등을 참작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한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에 처한다."
이마저도 이근안은 형이 과하다며 항소했지만, 결국 형은 이대로 확정됐어.
"대법원은 납북 어부 김성학 씨를 불법 감금하고 고문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이근안 전 경감의 상고심에서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피해자 가족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판결이었지.
"그 사람은 저희 아버지하고 뒤바뀌었어야 해요. 고문과 모든 갖은 그 증언들, 뭐 이렇게 수집해서 아버지를 사형자로 만들었잖아요. 사형 정도는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이 소리예요."
-최봉준, 고문 피해자 가족
이근안이 조작한 사건 중에 사형을 선고 받은 사람이 있다고 했지? 그게 바로 봉준 씨의 아버지였어. 그럼, 그 사형이 실제로 집행됐을까?
"서울구치소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한테. 아버지가 사망하셨으니까 와서 시신 수습해 가라고. 오늘 아침에 사형이 집행됐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거기서 막 울화통이 터져서. 어떻게 그냥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오더라고요. 네놈들이 어떻게 너희 마음대로 해서. 사형 집행해 놓고. 이제 돌아가시니까 시신 찾아가라고?"
-최봉준, 고문 피해자 가족
1985년 10월 31일, 봉준 씨의 사형이 집행됐어. 아버지가 이근안에게 끌려간 지 3년 만의 일이야. 가족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전하지 못 한 채, 혼자 사형장에 끌려가던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당시 사형장에 입회했던 목사님이 직접 쓰신 글이 있어.
"마침내 교도관들에 부축된 채 최을호(아버지) 씨가 집행장 문으로 들어왔다. 교도관들은 머리에 보자기를 씌우고 두 발과 상체를 밧줄로 감고 끌어들일 때, 죽기가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끌려가지 않으려 하나 역부족임을 깨달은 듯 체념하며,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다."
이뿐만이 아니야. 줄줄이 끌려갔던 봉준 씨의 사촌들도 모두 돌아가셨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큰형님은 구치소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마을 이장님이었던 둘째 형님은 9년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지 4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 '김제 가족 간첩단'으로 불렸던 봉준 씨의 가족들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어.
유일하게 무죄를 받은 김성학 씨 역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어. 간첩 혐의를 받았던 것만으로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을 받으며 지내야 했거든. 행여나 가족들마저 연좌제로 고통받을까봐 성학 씨 스스로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어야 했어. 그렇게 아꼈던 늦둥이 딸도, 그 뒤로는 거의 못 보고 살았어.
남일 씨의 사연도 다르지 않아. 슈퍼맨이었던 그의 형은 고문으로 다리를 크게 다친 뒤, 심한 우울증으로 크게 힘들어 하셨대. 그러다 결국, 형님과 어머니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아.
"다 힘들었죠. 말은 안해도. 마을에서도 그냥 수군수군하고,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그러니까 같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사건 뒤로는. 그래서 우리집도 다 처분해 버렸고."
-최봉준, 고문 피해자 가족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 형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살 수가 없어. 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나게 만들어서. 누구한테 어디 가서 하소연을 못하니까. 내 가슴만 아픈 거예요."
-박남일, 고문 피해자 가족
"내가 우리 아이엄마 보고. 나는 간첩이 아닌데. 왜 이렇게 간첩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됐다. 어떡하면 되냐…"
-김성학, 고문 피해자
이들의 삶을 누가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얼마 후, 봉준 씨와 남일 씨는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어. 이제라도 가족들의 한을 풀어주려 한 거야. 재심 결과는? '전원 무죄'. 무려 40년 가까이 그들을 괴롭힌, 심지어 죽어서도 벗어나지 못한 간첩이라는 꼬리표를 드디어 떼어내게 된 거야.
그럼 이근안과 피해자들의 악연은, 이제 정말 끝일까? 안타깝게도 아직도 끝나지 않았어. 이근안은 7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뒤 조용히 사는듯 했어.
▲ 다시 나타난 이근안
그런데 2012년, 갑자기 그 사람이 공개석상에 나타났어. 이근안이 자서전을 내고 떠들썩하게 출판기념회를 연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우리가 어떤 작품이나 영화를 보고서 감독해서 울고 웃는 것은, 감동이 있기 때문에 심문도 상대가 감동돼야 자백합니다. 그 다음에 전기 고문은 트릭을 쓴 거예요. '당신 같은 사람은 전기로 지져야 해' 겁을 잔뜩 줘놓고서 AA 배터리, 내가 오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거 하나만 가지면 불도 붙일 수 있어요. 그랬더니, '잘못했습니다. 전부 이야기 하겠습니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없냐고 묻자)사죄합니다. 사죄하니까. 내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예는 못 갖춰도, 종교적인 회개의 삶을 통해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간 알려진 고문 행위는 모두 피해자들이 과장한 이야기래. 그 칠성판에서 했던 전기 고문도, 작은 건전지 두개만 사용한 것 뿐인데, 눈을 가린 피해자들이 오해한 거래. 이 외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말들을 남겨.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남영동 그 시커먼 벽돌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거기서 대공 업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었어야지 지금."
-이근안
"2000년대에 진실화해위원회라고 하는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있었는데, 그때 참고인으로 이근안 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 검사나 판사가 같은 증거를 가지고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느냐? 본인이 잘 수사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바뀌어서 무죄를 받은 거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 속에 '간첩이다'라고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그런 질문들을 합니다. 혹시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마음이 있는가. 만약에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하면, 저희가 그런 자리를 실제 만드는 일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을 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었죠."
-변상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그의 자서전에 간첩이라 적힌 사람 중에는, 남일 씨, 봉준 씨의 가족들도 있어. 이근안의 이 거짓 주장에 피해자 가족들은 또 다시 끝없는 낭떠러지에 떨어진 기분이었대. 결국 이 지독한 악연을 끊기 위해 두 가족은 재판을 열게 돼. 그런데 두 가족의 공소시효가 이미 끝났잖아. 딱 하나,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바로, 민사 소송. 남일 씨는 이근안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어. 이근안, 재판에 나와 무슨 소리를 했을까?
"이번에 민사 재판에 그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두 번이나 안 나온 거예요. 근데 나는 이제 누구나 다 그런 얘기 하겠지만,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이근안을 단죄해서 그 죄를 원대로만,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 전에 그 원대로만 돌려놨으면 저는 좋겠다, 그 얘기죠."
-박남일, 고문 피해자 가족
유족들이 바라는 건 딱 하나, 이근안의 진심 어린 사과였어. 작년인 2024년 6월, 재판부는 이렇게 판결했어.
"이근안의 고문 행위 뿐만 아니라 자서전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를 했다는 점까지 인정한다."
국가가 이 유족들에게 배상해야 할 총 손해배상액 7억 여원 중 2억 여원은 이근안이 공동 지급해야 해. 그런데 그는 안 냈어. 남일 씨 가족뿐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의 소송까지 이어지며 이근안이 배상해야 할 금액은 수십억이 넘어. 그런데 이근안은 묵묵부답. 재판부의 요구에 그냥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대.
그럼 이 돈, 누가 내는 걸까? 바로 우리 세금. 국가가 먼저 배상한 뒤 이근안에게 다시 받아야 해. 이걸 '구상금 청구'라고 해. 정부는 이근안에게 구상금 청구 소송을 재기했고, 지난해 7월 승소했어. 이근안의 불법행위 때문에 막대한 재정을 지출했으니, 책임 지라는 거야. 그 액수만 무려 33억 6천만원이야. 게다가 하루하루 이자도 붙어. 지금 이 순간, 이근안이 내야할 이자만 무려 10억 원에 가까워. 눈덩이처럼 액수는 계속 불어나는데,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아.
여기까지가, 바로 지금, 오늘의 상황이야. 이 사건은 현재 진행형이야. 어쩌면 이근안을 찾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건지도 몰라. 우린 아직 그에게 들어야 할 말도, 받아야할 것도 남았으니까. 37년 전, 수배 전단을 들고 피해자들 곁에 섰던 사람들처럼, 이제 우리가 함께 해야하지 않을까. 이 길고 긴 수배가 끝나면, 그때 비로소 오늘의 이야기도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거야.
고문의 후유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육체적인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적인 피해도 상당하대. 고문 피해자들의 조현병 진단 확률은 일반인보다 20배나 높대. 근데 그들의 심리적인 후유증이 가족들에게도 전이가 된대. 우리가 만난 유가족들 역시 비슷한 고통을 겪고 계셔.
"지금도 항상 이근안이 쫓아오는 꿈을 꾸고. 난 지금도 선생님들을 못 믿는 게, 이 사람들이 SBS로 위장해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중에 여기서 갈 때, '박남일 씨 그동안 고생했어요' 이렇게, 수갑을 채워서 가지 않을까. 지금 머릿속에 난 그것도 지금 있는 거야."
-박남일, 고문 피해자 가족
남일 씨는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형이 잡혀갔던 그날의 악몽 속에서 살고 계셔. 이근안의 피해자 중 한 명은 고문을 이렇게 표현했어. '고문은 한 인간의 영혼을 짓밟아 놓는 것이다'라고.
"나도 그 일로 인해서 정말, 자꾸 이렇게 눈물을 흘려야 되고. 또 생각하게 되고. 하고 나면 며칠은 또 꿈에서 자꾸 나타나. 그렇지만 하기 싫어도 하는 이유가. 두 번 다시 나 같은 사람 나오지 말아야 하고. 녹을 먹는 공무원으로서 절대 이런 행위를 해선 안된다는 거…"
-김성학, 고문 피해자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akang@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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