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둘 수도 있다는 마음

2025-12-30

12월이 바쁜 건 찜찜함 때문이다. 해가 가기 전에 얼굴 한번 봐야 하지 않나 싶은 의무와 그리움이 적당히 섞인 모임들이 달력을 채운다. 적당한 관계의 지인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작은 후련함이 남는다. 이빨을 닦은 듯한 개운함이다. 그날 저녁도 그랬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근황 토크를 했다. 직장생활은 무난했고, 입시 스트레스도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말끝마다 “지겨워요” “아침마다 사무실에서 인사 나누는 것도 짜증나요”라며 동료에 대한 불만, 조직문화의 답답함, 비전이 없는 회사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맞장구를 한참 하다가, 가볍게 물었다.

“그렇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않아?”

이 말에 “어떻게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요?”라며 자기 상황을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냐며 서운해했다. 느닷없이 이번에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얼굴로 돌변했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지?

후배는 보어아웃(bore out) 상태로 보였다. 적성에 맞는 일이었지만, 숙련에서 비롯된 지루함이 쌓여 어느새 무력감으로 이어졌고, 목적도 의미도 없다는 감각이 만성화됐다. 일이 많아 소진되는 번아웃과 달리 보어아웃은 권태가 주원인이다. 더 이상 짜릿한 만족의 순간이 없으니 하루하루가 귀찮고 뻔해진다. 집중력은 흐려진 채 익숙한 일을 적당한 수준으로 처리하며 시간을 보낸다. 권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으로 답답함을 풀고 있었다. 청년기의 성장도 멈춘 듯한데, 일 자체의 성취감 없이 직급에 따른 책임과 스트레스는 가중되며 부정적 감정만 늘어난다.

여기에 더해 가족에 대한 책임, 연로해가는 부모까지 겹쳐 밀려오는 스트레스가 중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다. 이때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몇 단계가 있다. 먼저 차 한 잔 마시거나, 잠깐 바람을 쐬며 지금의 불쾌감에서 시선을 돌린다. 두 번째는 “난 끝장이야”처럼 한쪽으로 쏠린 생각을 “아주 최악은 아니잖아”로 재구성해보는 인지적 재평가다. 세 번째는 라이프스타일을 건강한 방향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마지막으로 고려할 것이 환경의 변화를 가져보는 것이다. 빠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단기 처방부터 환경 자체를 바꾸는 구조적 변화를 순서대로 해보기를 권한다.

이 중 환경 변화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직장을 그만두는 건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는 것은 마음의 틀을 스스로 제한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하며 자리 잡아왔고, 직업이 곧 사회적 정체성이자 자신을 규정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 주변의 김부장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중년기에 접어들면 먹고사는 문제와 책임감이 운신의 폭을 가두고 시야를 고정해 더욱 힘든 경험을 한다. 이때 “정 안 되면 그만두면 된다”는 생각은 의외로 큰 도움이 된다. 실제 그만두라는 말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마음 만 갖는 것이다. 그래서 가볍게 말을 던졌던 것이다.

여행용 트렁크에는 확장지퍼가 달려 있다. 짐이 많을 때 이 지퍼를 이용하면 살짝 공간이 늘어난다. 그만둘 수도 있지라는 마음이 확장지퍼의 역할을 한다. 한결 가벼워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효과가 생긴다. 살다보면 뭐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당위성을 대체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시점의 전환이 필요할 때가 아닌가 했다.

여기에 보어아웃의 권태와 무력감이 더해져 오도 가도 못하는 갑갑한 마음이 한층 더 쌓여 있다 오랜만에 만난 정신과 의사에게 한꺼번에 분출된 것이다. 적당히 마무리되지 않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놀러와서 야근을 하는 기분이 들어 슬쩍 자리를 떴다. 옮긴 자리에서 다시 보니 그의 얼굴은 평소의 편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심각하게 걱정할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나도 안심이 됐다. 힘내라 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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