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1일.
칠성파 80여 명이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은 비단 범서방파뿐 아니라 지역 내 웬만한 조직이라면 일찍이 파악하고 잠행에 들어가 있었다. 남의 싸움에 괜한 피해를 보아서 좋을 게 없으니 강남 유흥가는 일시 휴업에 들어갔으며, 수하에 호스티스 여럿을 두고 있는 대장마담들은 단골들에게 일일이 문자를 보내 예약을 미루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동생아, 내 밑으로 다 연락해서 청담에 모이라 해라.”
범서방파의 나모씨는 3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호남 패밀리를 끌어모아 칠성파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20대 시절 영등포 일대에서 삐끼 생활을 하다가 1986년 범서방파에 가입, 이듬해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 살인 사건에 가담한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됐던 그다. 당시 같은 혼거실에 머물던 김태촌의 수발을 도맡으며 신임을 얻어 실세 자리까지 꿰찼다. 사업가적 수완을 발휘해 청담의 유명한 고깃집 사장으로도 활동했다. 다만 그가 독단으로 칠성파와의 전면전을 결정할 정도의 위상이었느냐고 따진다면 꼭 그렇진 않았다.
그때는 김태촌이 부산교도소에서 석방되기 일주일을 앞둔 비상시국으로, 말하자면 두목의 무사 귀환을 위해 떨어지는 낙엽도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체면이 상할 바에야 귀 한짝을 내준다는 게 조폭계의 불문율이라고 하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조직 원로에게 부탁해 사태를 조용히 무마하는 게 최선이었다.

“큰 형님(김태촌)의 출소일에 맞춰 우리 범서방파가 건재하다는 걸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고 떠들었다.” 전직 범서방파 조직원이 경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실상은 본인의 위상만 챙기려다가 사태를 키웠던 거다.”
두 조직이 충돌하기까지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하지만 나씨가 칠성파 간부 정모씨와 사업 문제로 룸살롱에서 만나 시비가 붙은 게 칠성파가 움직이는 명분이 됐다. 여기서 고개를 숙였다간 책임을 떠안게 되는 것은 물론 2인자 구도에서 한창 박치기 싸움을 벌이던 김태촌의 양아들 김모씨에게도 밀리게 된다. 나씨로선 그 사태만은 피해야 했다는 설명이다.
결국 조직 내 비상연락망이 가동되며 서열 순서에 따라 전쟁을 준비하라는 전파가 전달됐다. 그리하여 범서방파를 비롯한 전라도 패밀리가 나씨의 청담동 식당 앞에 집결한 시각은 이날 오후 10시. 검은 무리의 살기 등등한 모습에 놀란 시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해 해산을 지시하자 조직원들은 인근의 경기고 사거리, 잠원동 한강공원 주차장 등지로 흩어지는 한편 숙소에 구비해둔 야구 배트와 목검 등 흉기가 봉고차로 배달됐다.

당시 특공대로 차출된 조직원은 경찰 조사실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그날 새벽 1시인가, 형님들이 기수별로 2명씩 자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선봉에서 칠성파 애들 배때기나 허벅지에 칼침을 놓는 거죠. 한데 말이 자진해서 나오라는 거지, 거기서 손 안 들면 얻어터지는 건 당연하고 낙오자 취급돼서 동생들한테도 바보 소리 들을 텐데 무슨 수로 가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앞으로 나가니 ‘나중에 빵에 가더라도 옥바라지 잘해줄 테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선발된 특공대는 7명. 이들은 송파구 한 커피숍에서 대기하다가 맞은편 모텔에 1인 1객실로 투숙했다. 사실상 교도소 직행 티켓을 끊은 희생양들이다. 혹여라도 살인을 저지르면 앞으로 사회물은 구경도 못 하게 될 공산이 크다. 객실 하나에 죄다 집어넣었다가 딴생각을 품은 조직원이 선동해 다 같이 도주할 위험성까지 고려한 조치다. 거기다 특공대원의 핸드폰도 일일이 수거함으로써 일말의 소통마저 차단했다. 이때 선배들은 현장에서 철수했지만 특공대는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모텔 객실에 혼자 남은 한 조직원은 선배들이 사다 준 편의점 도시락 뚜껑을 열었으나 도통 식욕이 없었다. ‘너는 총알이다. 방아쇠를 누르면 바로 튀어나가는 총알이다. 자아도 없고, 생각도 없다. 명령만 기다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