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달리는 좀비’는 처음이지

2025-01-08

28일 후

감독 대니 보일

배우 킬리언 머피, 나오미 해리스, 크리스토퍼 에클스턴

상영시간 113분

제작연도 2002년

영화를 사랑하고, 특히 호러 영화를 사랑하는 기자가 ‘호달달’ 떨며 즐긴 명작들을 소개합니다. 격주 목요일에 찾아갑니다.

좀비는 수없이 많은 호러 영화가 사랑하는 캐릭터다. 세계 최초의 좀비 영화인 <화이트 좀비>(1932),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7), <좀비의 역병>(1966)은 모두 부두교 주술을 다룬 작품이었다. 현대 관객이 ‘좀비’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이미지를 구축한 좀비 영화는 조지 A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 최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좀비 영화 장르는 로메로 영감의 그림자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대니 보일 감독의 <28일 후>(2002)가 깜짝 등장해 좀비 영화의 역사를 새로 썼다. <28일 후>는 영화사상 최초로 ‘달리는 좀비’가 나오는 작품이다.

<28일 후>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력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사람을 폭행하고, 자동차를 밀어버리고, 물건을 부순다. 한국 경찰이 시민들을 짓밟고 때리는 장면도 나온다. 폭력 장면들이 반복 재생되는 모니터들을 원숭이가 결박당한 채로 쳐다보고 있다. 이곳은 영국의 한 실험실이다. 원숭이들은 투명 사각 우리에 갇혔는데 왠지 잔뜩 흥분한 상태다. 그때 동물권 활동가들이 실험실에 난입해 점거한다. 연구원은 “원숭이들이 감염돼 어떤 약도 듣지 않는다”고 말한다. 활동가가 “감염원이 뭐냐”고 묻자 연구원이 겁에 질려 대답한다. “분노!” 활동가들은 원숭이들을 구출하려다 오히려 공격당한다. 원숭이에게 목을 물린 여자가 입에서 피를 뿜으며 괴성을 지른다. 그로부터 28일 후, 병원에서 깨어난 택배 배달원 ‘짐’(킬리언 머피)은 영국이 멸망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대니 보일의 ‘달리는 좀비’는 별 것 아닌 듯 싶지만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28일 후> 이전의 20세기 좀비는 인간보다 느리고 멍청했다. 하지만 <28일 후> 이후의 21세기 좀비는 더 이상 꾸물거리지 않는다. 잭 스나이더 감독이 로메로 감독 원작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2004),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의 <나는 전설이다>(2007), 마크 포스터 감독의 <월드워 Z>(2013),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2016)과 <반도>(2020), TV시리즈 <워킹 데드>와 <킹덤>에는 모두 달리는 좀비가 나온다. 달리는 좀비는 전에 없었던 속도감과 박진감을 스크린과 객석에 전염시켰다. <28일 후>는 영화사적 의미가 크지만 장르적 쾌감 자체도 굉장한 작품이다. 발작하듯 사지를 펄떡이며 달려오는 좀비들 뒤로 존 머피의 암울하고 불길한 록 음악이 따라간다. 필름이 아닌 디지털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해 화면이 뿌옇게 흐리지만 기이한 사실감이 느껴진다.

<28일 후>는 좀비 자체의 공포보다도 좀비에 대적하면서 좀비보다 더 흉악하게 변하는 인간을 보여준다. 주인공인 ‘짐’을 연기한 킬리언 머피의 연기력이 빛을 발한다. ‘짐’은 전반부에선 어수룩하고 무기력했지만 후반부에서 ‘셀레나’(나오미 해리스)와 ‘해나’(메건 번즈)를 구하는 모습은 특수부대 뺨치게 신출귀몰하다.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짜릿한 스릴을 불어넣는다. 웃통을 벗은 채로 적에게 달려드는 짐의 모습은 좀비를 닮았다. 잘 만든 좀비 영화는 좀비와 인간을 구별하기 어려운 ‘인간성이 절멸한 세계’를 구현한다. 인간의 활동이 정지한 도시의 스산한 적막감은 일품이다.

<28일 후>의 후속작은 후안 카를로스 프레스나디요 감독의 <28주 후>(2007)다. <28일 후>의 야성적인 매력은 줄었지만 스케일을 키워 도시의 아비규환을 살려낸 수작이다. 감독은 바뀌어도 음악은 역시 존 머피의 몫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는 대니 보일 감독이 18년만에 돌아와 연출한 <28년 후>(2025)가 개봉할 예정이다. <28일 후>의 주연 배우 킬리언 머피도 <28년 후>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머피가 직접 출연했다는 소문도 있다. 대니 보일 감독은 <28주 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말을 따르지 않고 <28일 후>에서 <28주 후>를 건너뛰고 <28년 후>를 연결했다. <28년 후>는 무려 3부작이 될 것이라고 하니 호러 팬의 마음은 설렌다.

<28일 후>에는 위스키 마니아라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장면도 나온다. 대형마트에 들어간 ‘프랭크’(브렌던 글리슨)가 집어드는 위스키는 다름아닌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명작 ‘라가불린 16년’이다. 위스키 이름이 명시적으로 나오진 않지만 상자의 외관으로 알아볼 수 있다. “자, 16년짜리 싱글몰트야. 색이 진하고 풍미가 가득해. 부담스럽지 않고 따뜻하지. 피트(이탄)의 뒷맛이 있어. 불은 꺼진 뒤에도 온기를 남기는 거야.” 나중에 ‘헨리 소령’(크리스토퍼 에클스턴)도 짐에게 라가불린 16년을 대접한다. 독자께선 라가불린 한 잔과 함께 <28일 후>를 즐기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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