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중산층 기준’의 패러독스

2024-07-08

각종 경제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 상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잘사는 나라인가?

우리나라 통계상 중산층은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다고 한다. 따라서 한국은 잘사는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질문은 패러독스, ‘알쏭달쏭한 역설’이다

‘서울에 30평짜리 아파트 자가 소유, 부채 없음, 현금 및 금융 자산 1억원 이상, 자녀 2명, 매년 해외여행 1회 이상….’

항간에 떠도는 중산층의 기준이다. 한눈에 보아도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일단 부채 없이 서울에 30평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으며 금융자산까지 1억원이 있다면 가계순자산은 거의 확실하게 10억원이 넘는다. ‘2023년 가계금융복지 조사’에 따르면 가계순자산이 10억원을 넘는 가구는 상위 10.3%에 해당한다.

소득과 소비는 가구의 크기와 여러 조건에 따라 일률적으로 말하기 힘들지만, 특별히 무리하지 않으면서 4인 가구가 매년 1회 이상 해외여행을 하는 수준의 씀씀이가 가능하려면 가처분소득 기준으로 가계소득이 연 8000만원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 경우 상위 20%에 해당한다. 아무리 보아도 이는 상층 혹은 중상층이지 중산층이 아니다. 참고로 같은 조사에 따르면, 가계순자산과 가구 소득의 중간값은 각각 2억4000만원, 5400만원 정도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이 나온다. 첫째, 도대체 누가 저런 기준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일까? 둘째, 어째서 사람들은 한참 위로 치우쳐 있는 이런 기준을 마치 진정한 중산층의 기준인 양 여기는 것일까?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 연구로 올해 초 한국개발연구원에서 발표한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를 들 수 있다. 이 연구는 자산이나 소득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 중 많은 수가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여기고 있다는 현실과 의식의 괴리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즉 소득 기준으로 볼 때 상위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중산층 심지어 하위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들의 비율이 무려 17.8%에 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가짜 중산층’이 사회적 담론과 문화에서 과도하게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교육 수준과 구매력에서 그 아래의 계층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2010년대 초 부동산 값이 일시 하락했을 때,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가 원리금 상환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들이 이른바 ‘하우스푸어’ 담론을 만들어 냈던 것이 하나의 좋은 예이다. 거액의 대출을 받아 비싼 아파트를 사서 소유하는 이들이 어떻게 빈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집단에는 기자나 방송국 PD 등 사회적 담론을 주도하고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다수 있었고, 결국 이 어처구니없는 ‘하우스푸어’라는 말도 잠깐이지만 인구에 회자되는 일이 벌어진 바 있다.

중산층 기준,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들이 중산층 담론의 주도권을 쥘 경우, 그 아래에 정말로 위기에 처한 중하층의 목소리가 사회적 담론 및 국가 정책에서 과소대표될 위험이 있다. 같은 연구에 따르면 소득 기준으로 중산층에 속함에도 스스로를 하층으로 인식하는 ‘취약 중산층’도 20%에 달했다. 당장 내일이라도 생활 수준이 하층으로 밀려날 수 있다는 위기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 말한 ‘가짜 중산층’의 목소리에 담론과 정책이 과도하게 흔들리는 일을 지양하고, ‘취약 중산층’에 좀 더 무게중심을 두기 위한 노력이 절실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 즉 왜 저 터무니없는 ‘중산층의 기준’에 사람들이 휘둘리는가의 질문은 좀 더 답하기 어렵다. 계급 계층 의식이라는 것은 객관적 수치와 통계가 아니라 (많은 숫자의 통계에 입각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요인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통계 수치의 계산을 잠깐 뒤로하고, 이러한 현상 자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중산층’이라는 말이 가진 정치·사회·문화적 함의로 시야를 넓혀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무엇보다도 삶에서 경제적 독립성과 다방면의 자유를 누리는 계층을 뜻한다. 영국 역사를 볼 때 그 원형이 되는 것은 중세의 ‘향사 계층(yeomanry)’이라고 할 수 있다. 귀족이나 엘리트 특권 계층은 아니지만, 늘 생계를 걱정하면서 인격적·정신적으로 누구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서민과 달리 자기 토지와 재산을 소유하며 자기 삶의 터전에서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영향력도 가지면서 살아가는 ‘자유민’을 의미한다. 로빈슨 크루소의 아버지가 아들의 방랑벽을 만류하면서 매력적으로 묘사했던 중간 계층 삶의 모습도 대략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중간 계급은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중산층이 정책과 제도에서 사회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복지국가가 대두하면서부터다. 복지국가의 이념을 제시한 사회사상가 마셜(T H Marshall)이 말한 사회적 시민권 또한 이렇게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고 그에 근거하여 정치·사회·문화 활동에서 일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태를 일컫는 것이었다. 이것이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중산층이라는 말의 함의와 대략적으로 일치한다. 즉 중산층이란 한마디로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고 다방면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을 이른다는 정서이다.

문제는 독립성과 자유 확보에 달려

이러한 맥락을 깔고 앞에 나온 ‘중산층의 기준’을 다시 보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이들의 생각 속에서는, 경제적 독립성을 가지고 다방면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서울의 30평 아파트로 시작하여 줄줄이 이어지는 그러한 정도의 자원을 가져야만 한다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잠깐만 정보를 찾아보고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부조리함을 곧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다는 것은 그 증후에 해당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주거, 교육, 의료, 노후 등의 문제에 있어서 미래에 대해 큰 걱정 없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자원이 필요할까? 그리고 정치적 의사 표현이나 문화적인 향유 및 참여, 자신의 삶을 뜻대로 계획할 수 있는 자유를 충분히 누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조건이 필요할까? 이것은 객관적 수치를 들이댈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또 정치적·사회적으로 따져본 중산층이라는 말의 함의는 그러한 독립성과 자유가 확보되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나의 소득과 자산이 사회 전체의 중간값이나 평균을 얼마나 웃도느냐 밑도느냐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한 독립성과 자유를 확보했다는 실감이 있다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생각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통계 수치가 어찌되었든 자신은 중산층이 못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70~80%는 경제적 독립성과 자유의 실감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통계 수치로 보면 분명히 중산층에 해당하는 사람마저도 상위 20%의 사람에게나 허용되는 경제적 수준을 ‘중산층의 기준’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객관적 수치로 따진다면 중산층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며 또 항상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적·사회적인 의미로 따져본 중산층은 다른 문제이다. 그 숫자가 적을 수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 기준이 통계적 중간값이나 평균과 얼마든지 크게 괴리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잘 사는 나라인가, 가난한 나라인가. 각종 경제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전 세계 상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 잘 사는 나라인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독립성과 자유를 확실히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상위 20%의 삶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가난한 나라인가. 게다가 앞에서 인용한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객관적 수치로 볼 때 통계상 중산층은 우리나라의 경우 전혀 줄어들고 있지 않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런 질문을 패러독스, ‘알쏭달쏭한 역설’이라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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