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한국비구니’ 출간
일본 불교 전파·독립운동 등 활약
고려시대 남성 한정 승과 시험
성차별·참종권 문제 ‘현재 진행’
삼국시대 신라에서 나온 첫 승려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출가를 자원한 사람은 여성이었으며, 이들을 지도한 이는 고구려의 비구니였다.
출가한 승려 하면 우리는 흔히 남성인 비구를 떠올린다. 성철 스님, 법정 스님 등 이름난 한국의 스님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하지만 한국 불교에서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의 역사는 1700년에 이른다.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비구니들은 역사의 부침 속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는 종단 내의 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1700년 비구니 역사를 촘촘히 복원한 <역사 속 한국 비구니>(민족사)가 출간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 산하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와 진영숙 책임연구원이 함께 쓴 책은 40종이 넘는 고문헌을 검토하고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통해 한국 비구니사를 정리했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는 “세계 여성 불교 역사에서 1700년이라는 비구니 역사를 중단없이 이어온 나라는 한국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며 “삼국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문헌을 바탕으로 철저히 밝힌 것은 이 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불교문화가 꽃피웠던 삼국시대, 신라에 불교가 전해지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들은 여성이었다.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고구려 아도 스님의 모친 고도녕과 신라 최초의 출가자인 사씨(史氏) 스님이다. 고도녕은 아들 아도 스님을 5세에 출가시키고, 중국 위나라로 유학을 보내 불교 교육을 받게 한 후 신라로 보냈다. 토착신앙에 의지한 당시 신라의 정치세력은 자객과 독약 등으로 아도 스님을 해치려 했다. 아도 스님은 모록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삼국유사>엔 “모록의 누이동생 사씨가 스님에게 귀의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 불교의 시작에도 고구려의 비구니 법명 스님의 활약이 있었다. 백제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후 3명의 지원자가 나타났는데, 모두 여성이었다. 이들은 백제계 도래인 출신의 귀족 집안 여성이었으며, 법명 스님의 지도를 받았다. 3명의 일본 여성 출가자는 백제로 와 2년을 머물며 구족계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책은 “일본 문헌에 고구려 비구니 스님이 등장하고, 또 그녀가 최초의 백제계 일본인 여성 출가자들을 지도했다는 것은 삼국에서 비구니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음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가 종교가 되면서 비구니들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다. 광종 때 불교를 국가의 공적 지배 아래 두기 위해 승과제를 만들었는데, 승과 시험 응시자격이 남성 출가자에게만 주어졌다. 비구니들은 교단 운영의 중심에 설 자리가 없어지면서 공식 기록에서 멀어졌다. 신앙생활과 수행에 집중하는 모습만이 간헐적으로 기록됐다.
역설적으로 불교가 억압받을 때 비구니들의 활동은 활발해졌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억압받자 왕실 여성을 중심으로 불교를 지켜내려는 노력이 활발해졌다. 훈민정음 창제 후 여성들은 불서 한역 과정에 중심이 되어 사업을 추진했다. 불서 간행을 위해 재정적 지원에 나선 사람들을 기록한 ‘시주질’을 보면 비구·비구니는 물론 상층 관료에서부터 남녀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다. 책은 “한국여성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통시대 중 여성들이 공심에 의해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시기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 세종대왕의 며느리 혜원 스님, 불경에 해박하고 왕실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으며 생불로 추앙받았던 사실 스님 등이 이 시기에 활약했다.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국채보상운동과 독립운동에 많은 비구니들이 참여했다. 제주 불교를 중흥시킨 비구니 봉려관 스님은 항일운동 군자금을 조달하고 항일인사들에게 의식주와 은신처를 제공했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보각 스님이 독립운동을 도왔다. 윤봉길 의사를 김구에게 소개해줬으며, 해방 후 김구 주석 밑에서 부녀부장을 맡기도 했다. 탑골 보문사의 은영 스님은 친일 권승 강대련의 횡포에 끝까지 저항하며 절을 지켜냈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비구니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버려진 사찰과 폐사지로 들어가 사찰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애써 재건한 사찰의 주지 자리를 비구에게 빼앗기는 등 불교계의 성차별에 직면하기도 했다. 비구니 참종권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1954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으로 선출된 50명 가운데 10명이 비구니였다. 현재까지 남녀가 평등한 종단 구성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비구니승가연구소 소장을 맡았던 수경 스님은 “한국 비구니 역사는 곧 한국 여성의 역사이기도 하므로 이 책이 우리나라 여성사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