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기 든 재미 조각가 존 배…흐르는 선율처럼 철사 녹여내

2024-09-06

예술가와 친구들

조각가 존 배(John Pai)는 193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조부 배창근(1867~ 1909)은 구한말의 의병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사했다. 부친은 독립운동가인 배민수(1896~1968) 목사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모친 최순옥은 러시아혁명을 피해 한반도로 건너왔다. 해방 후 미소공동회담이 열렸을 때 소련측의 통역을 맡았다.

배민수는 일제 경찰에 의해 1918년에 1년형, 3·1만세 운동 뒤에 또 1년 6개월형을 받아 복역했다. 1931년 도미하여 시카고의 장로회신학교(멕코믹 신학대)를 다녔다. 존 배가 태어난 이듬해 배민수는 1938년 2차 도미하여 항일활동을 하며 프린스턴 신학대를 다녔다. 일본 경찰이 지독하게 자주 존 배의 집을 찾아와 사찰했다. 사찰에 지친 최순옥은 1941년 거처를 아예 시골 일산으로 옮겼다. 거기서 땅을 구해 농원을 가꾸었다. 그 농원을 ‘에덴의 동산’이라 이름 지었다. 낮에는 꽃이 피고 밤에는 별이 뜨는 동산이었다. 존 배의 할머니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어린 손자에게 옛이야기를 해주었다. 별과 옛이야기가 소년을 아득하고 몽환적인 비현실로 이끌었다.

김환기 아내 김향안 주선으로 FIAC 참가

존 배가 사리분별력이 생긴 이후로 부친을 처음 만난 건 해방이 되어 아버지가 귀국한 후다. 1948년 존 배 가족은 미국 육군 수송함 제너럴 H. F. 호지스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열차를 타고 동부를 향했다. 오하이오를 지나 웨스트버지니아주 휠링에 내렸다. 거기에는 배민수 목사의 신학교 동기생인 아서 프릿처드가 살고 있었다. 그가 배씨 일가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미국인으로 살려면 미국 이름이 있어야 한다며 아서 프릿처드가 즉석에서 작명을 했다. 존 배의 본명은 배영철이다. 그날부터 영철은 ‘존’, 그의 누나 영애는 ‘메리’가 되었다.

존 배는 예체능에 탁월했다. 15살 때 미술개인전을 열 정도였다. 피아노, 색소폰, 클라리넷, 첼로 등 여러 악기를 연주했다. 자그마한 도시 휠링 시민은 모두가 풋볼(미식축구)에 열광했다. 소년 존은 곧 풋볼 선수가 되었다. 풋볼은 힘겨루기가 많다. 덩치가 좋아야 한다. 몸이 탄탄하고 주력이 뛰어났던 존 배는 주전 멤버가 되었다.

1958년 존 배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프랫 인스티튜트에 입학했다. 본격적인 뉴욕 생활이 시작되었다. 추상화가들, 음악가, 뉴욕시티 발레단,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 재즈 등등 새로운 세계가 존 배 앞에 펼쳐졌다. 산업디자인 전공으로 학사를 졸업하고 조각 전공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프랫 인스티튜트는 바우하우스를 닮은 데가 많았다. 3D 디자인을 전공한 학생은 나중에 디자이너 혹은 조각가가 되었다.

존 배는 건축에 재능이 많았다. 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로 건축사무소에서 일했다. 학생들에게는 허드렛일을 시키는데 존 배에는 드래프팅(3차원 모델을 도면화하는 작업)을 시키거나 직접 설계를 하게 했다. 존 배는 ‘형태’와 ‘구조’를 조형의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삼았다.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들의 조합을 거듭하다 보면 입체적인 구조물이 되고 필경 건축물에까지 이르게 되는 프로세스를 실험했다. 1964년 대학원을 마칠 무렵 스승인 건축가 윌리엄 카타볼로스를 통해 뉴욕의 플러싱 메도스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의 하와이 파빌리온을 짓는 데에 참여했다. 이 경력을 안 한국 정부가 아예 존 배에게 세계박람회의 한국관 파빌리온 설계를 의뢰했다.

1965년, 27세의 존 배는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 교수가 된 그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으로 간 지 17년 만이었다. 존 배는 서울에서 이은숙을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뉴욕으로 돌아갔다.

1963년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1913~ 1974), 김향안 부부는 젊은 후배작가인 존 배를 많이 격려해주었다. 1980년 김향안의 주선으로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FIAC에 참가했다. 김환기, 존 배 두 사람의 작품이 파리로 공수되었다. 이 무렵 김향안의 소개로 원화랑의 대표인 정기용(1932~ )을 만났다. 정기용은 중앙고교 재학 시절 이미 안목 높은 골동품 수집광이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후 풍산그룹에 입사한 정기용은 뉴욕 출장이 잦았다. 풍산금속 회장을 대신하여 김환기에게 얼마간의 돈을 전달하곤 했다. 고미술 전문가였던 정기용은 김환기를 만나고선 현대미술에 눈을 크게 떴다. 나중에는 인사동에 원화랑을 열고 김환기, 존 배, 백남준 등의 작품들을 국내에 소개했다.

FIAC에 출품한 존 배의 작품 앞에 매일 정기용이 나타났다. 정기용은 존 배의 작품을 보고 있는 관객들의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 존 배는 처음으로 출품하는 해외 아트페어라 신경이 쓰였다. 이때 정기용이 호쾌하게 말했다. “존 배, 걱정하지 마세요. 작가는 작품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걱정하면 안 됩니다. 작품이 안 팔리면 출품작은 내가 다 삽니다.” 1982년 존 배의 한국 첫 개인전이 서울 원화랑에서 열렸다. 이 무렵 정기용의 소개로 현대화랑을 알게 되었다. 현대화랑에서 존 배의 개인전이 처음 열린 건 1993년이었다. 존 배와 정기용, 두 사람은 옛것을 존중하며 현대미술을 모색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존 배는 피카소, 자코메티를 좋아한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작가가 몸소 겪은 삶의 신산함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존 배의 작품을 완성하려면 용접을 무한정 반복해야 한다. 손에 익은 아세틸렌 용접기를 고집한다. 존 배에게 불꽃이 나오는 용접기의 노즐은 붓과 같다. 단단한 철사는 용접기와 만나는 순간 물컹한 물감처럼 액체가 된다. 존 배의 조각은 자그마한 스테인리스 스틸 철사 한 조각에서 출발한다. 철사의 끝에 생장점이 있다. 불은 만난 철사의 끝의 생장점은 순간 액체가 된다. 미세한 물결도 일어난다. 또 다른 철사가 여기에 이어지며 단단해진다. 식물이 자라듯 조각이 자라난다.

음악을 좋아하는 존 배는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한다. “음악은 다음 음표(노트)에 관한 것이다.” 처음의 음표에 다음 음표가 대답한다. 그 대답은 질문이 된다. 다다음 음표가 또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이 끝없이 이어진다. 존 배에 있어 철사조각은 이어지며 음악을 완성해나가는 음표와 같은 것이리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존재하듯, 철사와 철사의 사이에는 물컹한 액상의 시간이 존재한다. 존 배의 이러한 작업 세계를 미술평론가 존 야우는 ‘리퀴드(액상) 스틸’이라 정의했다.

연세대에 일산 삼애농장 5만6000평 기증

스튜디오를 겸한 존 배의 집은 뉴욕 브루클린의 프랫 인스티튜트 앞에 있었다. 몇 안 되던 한국 미술인들이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한국요리를 그리워했다. 존 배의 부인 이은숙은 손이 크고 바지런했다. 손님 치르는 일을 힘들어하지 않았다. 예전의 뉴욕에는 한국 식품점이 따로 없었다. 차이나타운에 가서 배추·파·마늘·숙주 등을 구해다가 요리를 했다. 백남준·김창열·황병기·유덕형·백건우·김구림, 김차섭·김명희 부부, 천호선·김홍희 부부, 임충섭·박관욱·황인기·신현중·임영균 등 뉴욕에서 활동하거나 유학 중이던 한국의 예술가들은 수시로 존 배의 집을 드나들며 한국음식을 즐겼다. 존 배는 미국 오기 전까지는 짜장면을 몰랐다. 세월이 흘러 짜장면과 곱창전골을 좋아하게 되었다. 존 배의 브루클린 스튜디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때로는 음악회가 열렸다. 피아니스트 문익주, 소프라노 홍혜경이 등장했다.

배민수 목사의 유족들은 1976년 연세대에 5만6000평 되는 일산의 삼애농장을 연세대에 기증했다. 1993년 존 배의 조부 배창근, 부친 배민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존 배는 대한민국 국민의 세금을 쓸 수 없다며 국가유공자 유족연금 지급을 거부했다. 스마트폰이 있는데 사용할 줄 몰라서 한 달에 몇십 불 사용료만 내고 있다. 꽉 찬 인생인 것 같지만 그의 조각작품처럼 빈틈이 많다. 그 빈틈이 그의 인격과 예술의 본령인지도 모른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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