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러닝의 유행으로 가을철 주요 마라톤대회 참여가 ‘피케팅’(피가 튀길 정도의 치열한 티케팅)을 방불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러닝 암표’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마라톤에 참가할 계획이 없으면서도 일단 티켓을 예매한 뒤 온라인에서 웃돈을 얹어 되파는 것이다. 일부 중고거래 사이트에선 유사시를 대비해 연락처 등 개인정보가 담긴 ‘배 번호표(배번호)’까지 거래되고 있다.
지난 10월~11월 초 중고나라엔 ‘춘천마라톤 10㎞ 남자 (티셔츠)100 양도’ ‘JTBC 마라톤 10㎞ 양도합니다’ 등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주최 측에서 정한 10㎞ 코스 참가비는 7만원이었지만 1~2만원을 올린 값인 8만~9만원에 거래됐다. 올해 춘천·JTBC 마라톤 티케팅에 모두 실패했다는 권모(28)씨는 “돈을 더 주고 나갈까 싶기도 했지만 가성비 운동으로 시작한 러닝인데 10만원 가까이 내고 싶진 않았다”며 “마라톤 티켓까지 암표로 파는 건 너무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마라톤 티켓이 사실상 안전문제와 직결되는 배번호란 점도 문제다. 배번호는 주최 측이 참가자마다 부여한 숫자로, 개인의 이름과 연락처를 대조할 수 있고 종이 뒷면엔 비상연락망과 혈액형을 기입하도록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배번호를 타인에게 양도받아 뛰는 참가자는 도중에 긴급 상황이 발생해도 주최 측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대부분의 가을철 마라톤 대회 티켓이 “배번과 물품 그대로 넘기겠다”는 내용과 함께 거래되고 있다. 심지어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 마라톤 대회에서는 남성 참가자가 여성 명의의 배번호를 양도받아 순위권에 들어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러닝 암표와 배번호 중고거래를 관리할 필요가 있단 지적이 나옴에도 현행법상 이는 쉽지 않다. 체육시설법 21조에 따르면 정부는 체육시설 이용권 등의 부정판매를 금지하고 있지만 마라톤은 일반 도로를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인 만큼 ‘체육 시설’에 해당하지 않는다.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셈이다. 다만, 러닝 암표를 현장에서 팔다가 적발될 경우 이는 경범죄처벌법 3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
마라톤 대회 주최 측 대부분은 현실적으로 수많은 참가자의 배번호를 일일이 대조·확인할 수 없기에 난감하단 입장이다. JTBC 마라톤 주최 측 러너블 관계자는 “타인의 배번으로 접수된 인원이 초과된 상태로 운영될 경우 코스 내 급수 및 스폰지 부족 현상, 코스 혼잡, 골인 후 제공되는 완주 패키지 부족 현상 등이 발생할 수 있다”며 “대리 참가 적발 시 영구 퇴출 정책을 시행 중”이라고 말했다.
러닝 암표 외 참가비를 내지 않고 레이스에 참여하는 이른바 ‘뻐꾸기 주자’ 들도 주최 측의 골칫덩어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주로 참가자들과 같은 색상의 운동복을 입고 뛰거나, 과거 참가했던 대회·타 대회 배번호를 붙이고 뛴다. 주최측 입장에선 뻐꾸기 주자들로 인해 금전적 손해를 볼 뿐만 아니라 인파 관리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최근 한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던 최모(27)씨는 “뻐꾸기 주자들이 단체로 뛰면서 길을 가로막고 주최 측에서 준비한 물을 마시는데 얄미웠다”고 말했다.
박종현 전국마라톤협회 본부장은 “미국, 일본은 아예 배번호 검사 장소부터 출발선, 달리기 코스까지 모두 펜스로 막아놓기 때문에 러닝 얌체족은 거의 없다”며 “안전을 고려해서 마라톤 시설 등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건강한 마라톤 문화를 위해선 무엇보다도 정정당당하게 자신의 배번호를 달고 뛰겠다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