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 교과서 없는 시각장애 학생 방치는 위헌

2026-01-05

1983년 봄, 청와대 인근 서울맹학교에서 잠시 고등부 1학년생 네댓 명을 상대로 방과후 공부를 가르친 적이 있다. 당시 맹학교는 침술과 안마를 가르치는 기관이라 다른 직업을 갖고자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은 별도로 영어, 수학 등을 배워야 했다. 대학생이던 나는 그들의 책을 보고 기겁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영한사전이 점자책으로는 서가를 가득 채울 만큼 방대했다. 알파벳 ‘A’ 한 편이 일반 사전보다 두꺼워 사용 후 제자리에 꽂아두지 않으면 사전으로 기능할 수도 없었다.

일반학교에서 2월 말 배포되는 새 교과서가 맹학교 학생들에게는 1학기 중, 심지어 여름방학이 지나서 제공된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인쇄된 교과서가 나온 후 비로소 점자교과서 제작에 들어가는데, 민간기관이나 봉사단체의 수작업에 의존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공부하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는, 그야말로 책 기근(book famine)의 참담한 현장이었다.

통합교육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2008년부터 장애인도 일반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다. 과거보다는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같은 교실의 시각장애 학생은 교과서 없이 새 학기를 맞이하곤 한다. 점자책 제작이 늦어지다 보니 서두르는 과정에서 단원별로 쪼개 배포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어쨌든 3월 중 전 과목 책이 배포되지 않느냐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마치 빵, 고기, 양파를 따로 제공하고 나서 햄버거를 줬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헌법과 교육기본법은 전 국민에 대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천명하고 있으며, 특수교육법은 장애학생을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 대상으로 정하고 있다. 교과서는 교육의 시작이다. 의무교육 대상 학생에게 교과서를 제때 보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가 중대한 헌법상 의무를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교과서에는 국정도서, 검정도서, 인정도서가 있다. 교과서를 내려는 출판사는 검인정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만약 정부가 검인정 심사 항목에 장애인 교과서 항목을 둔다면, 출판사들은 신청 단계부터 이를 고려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인쇄된 교과서와 동시에 점자책이 보급될 수 있다. 그런데 교육부가 이 간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 집필자들도 교과서에 사진이나 삽화를 넣을 때 시각장애 학생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처음부터 이에 대한 설명을 곁들일 수 있다. 지금은 교과서 출판사가 인쇄 책을 납품한 후, 점자책 출판사가 집필자의 의도를 추정해 점자로 설명을 넣는 비효율을 반복하고 있다. 점자교과서에 교과서 지위가 인정되지 않는 한, 매번 교육부와 특수교육원 담당자의 선의에 기대야만 했던 시각장애 학생과 부모는 피가 마른다.

새 정부 들어 지난해 8월 그간 대통령령에 위임해왔던 교과서의 정의와 종류를 의회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초·중등교육법에 관련 조항을 신설했다. 드디어 ‘교과서 법률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교과서 법률주의가 절실히 필요한 장애학생 교과서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었다. 일반학교별로 시각장애 학생이 몇명 되지 않고 졸업하고 나면 아픈 과거가 될 뿐이라 이들의 요구는 개인 구제 차원에 머무르는 일이 반복됐다. 학창 시절에 교과서가 제때 보급됐다면 포기하지 않고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누군들 공부가 좋겠냐마는 공부하고 싶은데 책이 없거나 매번 늦게 나와 좌절한다면 희망은 사라지기 쉽다. 헌법에 의무교육 규정이 있음에도 국가가 이 아이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언제까지 꿈을 꺾는 일을 방관할 것인가!

모두에서 언급한 과외공부 학생, 김영일 조선대 교수(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는 1981년 여름 읽을거리가 변변찮던 맹학교 도서관에서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읽었다고 회상했다. 황강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고향이고, 이 책은 그의 전기다. 대통령 취임 직후 전기가 출간되자 동시에 전국 맹학교에 점역본이 배포됐다. 이런 충성심이 ‘국민’인 장애학생을 향했다면 점자교과서 적시 지급 문제는 진작 해결됐을 것이다.

개정 초·중등교육법에서 교과서 법률주의를 채택했음에도 여전히 점자교과서에 교과서 지위를 인정하지 않아, 드디어 시각장애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그 지독한 사슬을 끊기 위해 나섰다. 초·중등교육법 제29조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교과서 및 교사용 점자지도서를 명시하지 않은 것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새 학기 첫날 시각장애 학생들의 책상 위에도 점자교과서가 놓일 수 있도록 헌법재판소와 정부는 이에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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