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탄핵 정국에 산업계가 시름하고 있지만, 특히 울상인 분야가 있다. 안팎으로 겹겹이 악재에 둘러싸인 석유화학업계다. 중국발 저가 공습에 설비 증설로 인한 공급 과잉, 수요 감소 등 구조적인 문제로 불황의 늪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정치발 쓰나미까지 맞았기 때문이다.
석유화학 4사(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는 지난 3분기 총 5000억원이 넘는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3분기 차입금은 45조원 수준으로, 전 분기보다 40%(13조원) 늘었다. 자금 사정이 그만큼 좋지 않다는 의미다. 국내 나프타 분해시설(NCC) 평균 가동률은 70% 수준으로, 롯데케미칼‧LG화학 등은 이미 공장 가동을 중지하거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
정부도 석화업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하고 이번 달 지원책을 내놓기로 했다.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주축이 돼 사업 재편 촉진을 위한 지원책을 담은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내놓을 예정이었지만, 사실상 국정 공백이라 논의가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에 원유를 수입해 가공해서 수익을 남기는 업계 특성상 수익과 연결되는 환율도 계엄 사태 이후 출렁이고 있다. 지난 2일 달러당 원화 가격은 1403원이었지만, 현재 1430원으로 상승했다. 환율이 오를수록 원유 수입에 따른 원가 상승 부담이 커진다.
석화업계는 다음 달 취임하는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정책 기조에 기대를 품고 있다. 트럼프가 자국 내 더 많은 석유‧가스 생산을 독려하고 수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어서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트럼프 당선에 따른 미국의 석유생산 및 수출 확대로 인해 유가가 하향 안정화되면 에틸렌 생산비용이 감소해 생산원가가 줄 것”이라고 봤다.
다행히 최근 에틸렌 가격이 오름세다. 석화업계의 수익성 지표로 꼽히는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는 지난 두 달 새 110% 올랐다. 글로벌 유가 하락으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이 내려간 영향이다. 산자부에 따르면 이달 들어 평균 에틸렌 스프레드(11일 기준)은 t당 233달러를 기록했다. 10월(110달러)의 두배 수준이다. 국제 유가가 하락세를 보이고 중국이 지난 10월 1000억 달러 규모의 경기 부양책을 시행한다고 밝힌 영향도 있다.
새로운 활로인 리사이클링(재활용) 시장도 점점 커지고 있다. 당장 내년 유럽연합(EU) 회원국 공항에서 급유하는 항공기들은 기존 항공유 대비 탄소 배출량을 80% 줄일 수 있는 지속가능항공연료(SAF)를 최소 2% 이상 포함해야 한다. 2050년엔 70%까지 늘어난다. 업계에선 2050년 SAF 시장이 4020억 달러(약 577조원)로 커질 것으로 본다. SK트레이딩, 효성티앤씨 등이 SAF에 집중하고 있다.
특히 최근 석화업계가 눈여겨보고 있는 분야는 자동차다. EU가 폐차규제(ELV)를 강화하면서 재활용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으면 새 차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이 돼서다. ELV에 따르면 2030년부터 새 차를 만들 때 재활용 플라스틱을 25% 이상 사용해야 하고 이 중 25%는 폐차에서 나온 소재를 재활용해야 한다. 새 차를 만들 때 폐차 후 재활용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의미다.
독일 완성차 업체들은 이미 재활용 부품 사용률을 높이고 있다. BMW는 내년 출시 예정인 노이어 클라쎄 제품에 해양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든 플라스틱 부품 등을 30%까지 적용할 예정이다. 벤츠는 재활용 원료 적용 비율을 40%까지 올리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현대차나 기아는 아직 5%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석화업계 입장에선 새로운 먹거리다. SK케미칼은 최근 현대자동차‧기아의 친환경 소재 적용 실험 모델인 EV3 스터디카에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부품 6종을 공급했다. 금호석유화학도 친환경 타이어 소재 등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석화업계 관계자는 “폐차 재활용은 결국 소재가 관건이라 석화업계 역할이 중요하다”며 “넷제로(탈탄소)라는 글로벌 흐름이나 시장 규모로 봤을 때 재활용이 석화업계의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