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아빠의 재테크 상담소
“아빠 젊은 시절엔 돈을 은행에만 넣어놓아도 연 20%씩 이자를 줬다면서요. 대학 졸업장만 있어도 대기업 골라서 가고. 돈 모아서 집 사는 게 지금보다 훨씬 쉬웠던 거 아닌가요.”
어느 날 저녁 대학 졸업을 앞둔 스물두 살짜리 아들이 물었다. 부쩍 취직과 내집 마련, 재테크에 관심을 보이더니 드디어 ‘아버지의 비법’에도 눈을 돌린 모양이다. 고성장 시대에 꿀을 빨아놓고 ‘요즘 젊은 것들은 노오력이 부족해. 라떼(나 때)는 말이야~’만 되뇌는 노땅 세대에 대한 질시도 한 방울 섞였을 터다. 은퇴를 앞둔 50대 아빠는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아이들에게 무슨 얘기를 들려줘야 할까.
“아빠 젊을 때는 돈 모으기 쉬웠잖아요”
실제로 아빠들은 ‘꿀을 빤’ 세대일까. 당시 상황부터 보자. 일단 은행 이자가 두 자릿수인 건 맞다. 내가 처음 취직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그해 8월 벼락같이 금융실명제를 실시한 정부는 돈이 지하로 숨어들 것을 우려해 은행권의 팔을 비틀었다. 은행들은 부랴부랴 고금리 상품을 내놓았다. 조흥은행 신세대우대통장은 6년 만기가 12%, 12년 만기가 15%였다.

취직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보통 공장이나 건설 현장에서 일했고, 대학을 나오면 어렵지 않게 직장을 잡을 수 있었다. 1980년대까지는 명문대 인기 학과 졸업반이라면 10대 그룹 입사지원서를 못해도 서너 장씩 받을 수 있었다. 필기시험도 볼 필요 없이 면접만 통과하면 채용하는 일종의 ‘프리패스 티켓’이었다.
집값도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1990년을 기준으로 지금 물가와 비교해보면 담배 한 갑은 500원에서 4500원으로, 휘발유 1L는 400원에서 1800원으로 올랐다. 소비자물가지수를 살펴볼 때 1990년 1만원의 가치는 2024년 2만9670원에 해당한다. 당시 서울의 평균 아파트 가격은 3.3㎡(1평)당 200만~300만원 수준이었다. 30평 아파트가 6000만~9000만원 정도였다. 30년이 지난 2023년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평당 5000만원에 달한다. 전반적인 물가가 대략 세배 오르는 동안 아파트값은 최고 30배 올랐다는 얘기다.
새벽별 보고, 조인트 까이고, 월급은 짜고…
하지만 꿀을 빨았다고 하기엔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두 자릿수 예금 금리만 보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어둠도 짙은 법. 한국은행에 따르면 1990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9.9%, 물가상승률은 9.4%였다. 일반적으로 90년대 초반 시중은행의 정기예금 금리는 10%, 대출금리는 12.5% 수준이었다. 은행에 돈을 넣어놓아도 물가상승을 따라잡기 급급했다는 얘기다.
게다가 개인이 은행 대출을 받기도 어려웠다. 은행에 모인 돈으로 공장을 짓고 인프라를 까는 데 쓰느라 개인에게는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 3부(3%) 사채가 드물지 않았고, 월 2부(2%)면 양심적이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다. 은행 대출을 받으려면 ‘든든한 백’이 필수였다. 그나마도 대출을 받으면 절반 정도는 낮은 금리 상품에 예치하는 ‘꺾기’를 당연시하는 시절이었다. 괜히 전세라는 사금융이 성행한 게 아니다. 제도권 금융 업체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으니 전세를 끼고 일단 집을 마련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일자리 역시 마찬가지다. 고성장 시대라 일자리 자체를 찾기는 쉬웠다지만 그 수준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렵다. 일단 대학을 가는 것부터 문제다. 1990년대까지는 연합고사라 부르는 고등학교 입시를 치러야했다. 1년에 90만 명 이상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1955~74년)는 연합고사 점수에 따라 한 반 70명 가운데 절반 정도만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진학률은 20%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졸자 자체가 귀한 세상이었다.

직장 문화도 지금과는 달랐다. 기준 근로시간은 주 6일 44시간이었지만 사무직과 생산직 할 것 없이 야근과 주말 근무가 당연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새벽별 보고 나와 달 보고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사무실에서 욕설과 폭언은 기본이고, H사처럼 기업 문화가 거친 곳에서는 90년대까지도 구둣발로 정강이 차기(보통 조인트 깐다고 했다)는 물론 뺨을 때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대접을 받는 곳이 은행원이나 교사 정도였다. 괜히 교대 커트라인이 높았던 게 아니다.
90년대 초반 대졸 초임은 가장 많이 준다는 방송사와 금융업체 등이 1500만~1800만원, 삼성전자·현대차 같은 대기업은 1200만~1500만원 정도였다. 체감 물가는 지금보다 훨씬 비쌌다. 1989년 출시한 486 컴퓨터에 14인치 모니터를 합치면 300만원에 달했다. 요즘은 3기가헤르츠(GHz) 컴퓨터에 24인치 모니터를 달아도 30만원이면 산다. 주 6일 60~70시간 일하는 직장인이 3개월을 안 쓰고 모아야 브라운관 TV를 살 수 있었지만 요즘은 주 40시간 일하는 풀타임 아르바이트생이 한 달 월급을 모으면 고급 LED TV를 살 수 있다.
그때 애플 주식만 샀더라면…
그러니 아들아, ‘노땅들이 꿀을 빨았다’는 소리는 부분적으로만 맞는 얘기다. 일찍 이재에 눈을 떠 아파트를 두어 채씩 굴리거나, 운 좋게 좋은 주식에 투자해 대박 난 일부에게는 기회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꼬박꼬박 은행에 예금하는 소시민은 거북이처럼 늘어나는 자산과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는 전세값·집값을 보며 좌절하기 일쑤였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문을 닫은 케이스다. 제국주의 시대 열강이 아니었던 나라 가운데 2차대전 이후 새로 선진국에 진입한 거의 유일한 나라다. 대학도 문 닫고 들어가는 걸 최고로 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들이 200년 걸린 과정을 30년 만에 압축하다 보니 세대 간의 갈등이 말도 못 하는 수준이다. 후진국에서 급성장기를 경험한 60대 이상 기성세대가 고도성장에서 저성장으로 전환하는 40대와 함께 일하고, 저성장 시기밖에 경험하지 못한 20대와 소통하는 게 쉬울 리가 있나. 조언의 대부분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라떼는 말이야~’가 될 수밖에 없다.

아빠가 네 나이일 때는 미장도 모르고(해외 주식을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복권 사듯이 국장 개별 종목이나 사고(펀드나 ETF 같은 상품도 없었다), 집 산다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지도 않았다(전세자금 대출은 2008년에 생겼다). 그래서 1994년에 개봉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무슨 과일 회사에다 투자를 했는데 이제 돈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장면을 보며 웃지만 말고 애플 주식을 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액면분할을 고려할 때 당시 0.3달러던 애플 주식은 요즘 200달러로 700배 올랐다.
그럼에도 라떼 아빠가 재테크 실패담을 늘어놓으려는 이유는 20대 아들은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변화를 직접 보고 듣고 겪었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분쟁, 트럼프의 관세 폭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같은 충격적인 변화가 연일 벌어진다. 하지만 전두환의 쿠데타와 군사정권, 일주일이 멀다하고 재계 20위권 기업과 은행·증권사가 줄줄이 넘어가던 외환위기 등을 겪은 아버지 세대에게는 찻잔 속의 태풍 정도일 거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포함한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호들갑 속에서도 꿋꿋이 내 길을 걸어야 성공할 수 있다. 아빠의 실패에서 흔들리지 않는 성공의 길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좀 더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