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명물 전차부터 탄소중립 에너지까지
우리 일상 바꾸는 전기의 힘
움직이는 전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에너지인 전기는 현대 인류 문명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어두운 밤을 전등으로 밝게 밝히면서 밤에도 노동을 하거나 여가시간을 보내는 게 가능해졌죠.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고층 건물이 모인 도시의 야경은 인류 문명의 상징이기도 한데요. 인류는 언제 전기를 발견했을까요. 또 우리나라에서 전기는 언제부터 사용했을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이 전기박물관을 찾아 문명 발달의 견인차이자 경제 발전의 원동력인 전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알아봤어요.

전기(electricity)라는 용어는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 elektron에서 유래됐어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기원전 550년경에 호박(琥珀)이라는 보석에 작은 물체가 붙는 현상을 보고 호박을 문지를 때 정전기(static electricity)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는데요. 16세기 물리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실험을 통해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란 사실을 밝히고, 자기(磁氣)와 전기(電氣)를 구분하면서 그리스어 elektron에서 유래한 전기를 뜻하는 electricity라는 단어를 만든 거죠. 이후 1752년 벤저민 프랭클린이 번개가 전기임을 입증하고 피뢰침을 발명했으며, 1879년 토머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하는 등 수많은 연구와 발명이 누적돼 전기의 시대가 시작됐죠.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전기를 일상생활에 사용했을까요. 그 답은 서울시 서초구에 있는 전기박물관에서 알아볼 수 있어요. 전기의 소중함을 알리고 전기역사의 체계적인 보전과 전력 문화 이해 확산을 위해 한국전력이 2001년 개관한 전기 전문 박물관입니다. 이상일 학예사가 전기박물관 3층 전기역사관에서 김민영·박건우·서지안 학생기자를 맞이했죠.

전기 전문 박물관에 가다
전력산업은 세계적으로 1880년대에 형성돼 20세기 전반에 걸쳐 빠른 속도로 성장했어요. 우리나라는 19세기부터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양 과학서 등을 통해 전기지식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였어요.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은 1830년대 박물지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정전기를 일으키는 서양의 장난감 뇌법기를 언급했고, 또 다른 실학자 최한기도 1860년대 편찬한 의서 『신기천험』에서 전기의 물리학적 원리를 소개했죠.
1883년 11월 1일에는 『한성순보』에 전기의 원리를 간략히 소개한 기사인 '논전기'가 실리기도 했어요. "대체로 전기라는 것은 음양 두 기운이 합하여 하나로 된 것인데, 모든 물체에 존재하며 항상 가지고 있다. (중략) 은근히 숨어 있으면 빛도 소리도 없으며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저울로 달 수도 없다."

우리나라에 전기 도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건 외교사절단인 보빙사절단(보빙사)이 1883년 미국을 방문하면서부터입니다.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고종은 보빙사를 통해 서양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수용하고자 했어요. 민영익·홍영식·유길준 등 젊은 개화파 인물로 구성된 보빙사는 일본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뒤 1개월여 동안 미국 곳곳을 둘러봤는데, 특히 발전시설을 견학한 뒤 전기 생산의 원리와 중요성을 깨달았죠.
"당시 보빙사로 갔던 유길준은 '가스등과 전등으로 모든 집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으며, 전기가 출현하여 수많은 집을 두루 밝히며 우리 사회를 편리하게 해주었다'고 말했고, 홍영식은 '어지러울 정도로 눈부신 빛 속에 있었다'는 감상을 남겼습니다. 민영익은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로 들어갔다,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는 감상을 남겼는데, 자유롭게 빛을 사용하지 못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마음이 읽히는 대목입니다."

전기의 힘을 체감한 보빙사는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사회제도와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어요. 고종은 보빙사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했고, 1887년에는 왕과 왕비가 머무는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소가 설치돼 우리나라 최초의 전깃불이 밝게 빛났죠. 촛불이나 등잔불과는 다른, 어두운 밤을 대낮같이 밝힌 전깃불을 처음 본 사람들은 '도깨비불'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건청궁에 설치된 최초의 전등 모형을 보던 민영 학생기자가 "왜 건청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깃불이 설치된 건가요"라고 궁금해했어요. "건청궁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에서 벗어난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새로 지은 궁궐로, 고종의 정치적 자립과 근대화의 의지를 담은 상징적 장소였기 때문이에요."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소가 설치됐지만, 이는 궁궐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제한된 수준의 전기설비였죠.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근대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한성부 전기 공급도 그중 하나였어요. 1898년 1월 황실자본을 출자해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를 설립하고, 미국의 사업가 헨리 콜브란, 해리 라이스 보스트위크와 도급계약을 맺는 등 미국의 기술을 도입했죠.
한성전기회사가 추진한 첫 사업은 전기의 힘을 동력으로 궤도 위를 달리는 전차였어요. 당시 수도 한양에는 약 2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음에도 인력거·우마차·자전거와 같은 교통수단이 대부분이어서 대량의 운송수단과 대중교통이 필요했죠. 1899년 5월 4일 홍릉선(돈의문-홍릉)을 달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차가 개통됐어요. 도입 당시 전차에는 상등·하등칸 구별은 물론 남녀 좌석도 별도로 있었어요. 전차 차고지인 동대문발전소에서 열린 시승·개통식에는 고종황제가 직접 참석했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을 구경하고자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어요.

1902년 전차 승객의 숫자는 하루 평균 6476명을 기록해 전년 대비 약 69% 성장했고, 1905년에 이르러서는 1만2963명으로 두 배가량 증가했죠. 이는 당시 한성부민의 약 5~6%에 해당하는 숫자였어요. 전차는 1968년 운행을 멈출 때까지 시민의 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 한성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죠. 전차는 한성에 방문하면 반드시 타봐야 하는 명물로 알려졌고, 인기에 힘입어 배차 간격을 줄이고 야간에도 운행했어요. 또 전차 노선은 한성의 전통 상업지구인 종로와 물자의 집산지인 용산·마포나루 등을 연결했기 때문에 상공업 부흥에도 도움이 됐죠.
전기박물관 전시실에는 1900년대 초기 전차 모형과 승차권, 전차 차장이 승객 수를 계수하는 전차 요금 등록기 등이 전시돼 있었어요. 또한 전차도 실물 크기로 만날 수 있습니다. 민영·건우·지안 학생기자가 탑승해 봤는데요. 전차 안의 손잡이와 내부 벽에 붙어있는 여러 광고판 등 오늘날의 지하철과 거의 비슷한 형태였죠. "당시 전차를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요." 전차 내부를 주의 깊게 살피던 건우 학생기자가 말했어요.

이 학예사는 해리 라이스 보스트위크 앨범을 소개했죠. 앞서 대한제국이 황실자본을 토대로 미국의 기술을 도입해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다고 했죠. 하지만 대한제국의 자금난과 미국과의 관계 강화의 한 방책으로 한성전기는 1904년 고종과 콜브란·보스트위크가 각각 50%씩 출자한 한미전기회사로 전환됐어요. 이후 일본에 한미전기가 인수되는 과정에서 고종이 배제되면서 대한제국은 전력사업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었죠.
보스트위크 앨범은 120여 년 전 보스트위크가 찍은 사진과 관련 기사 등을 모은 사진첩으로, 그의 손녀가 한국전력에 기증했어요. 앨범 속에는 당시 전차에 대한 사람들의 여러 반응이 담긴 신문기사, 전차 요금표, 보스트위크가 직접 찍은 당시 사진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전기가 들어오면서 바뀐 한성의 여러 풍경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생활사적으로도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가치 있는 역사적 자료예요.

"많은 사람이 신기한 마음으로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어요. 1899년 전차 개통 9일 만에 탑골공원 앞에서 6세 아이가 일본인 운전사가 운전하던 전차에 치어 죽었죠. 이에 분노한 군중이 전차를 전복해 두 대를 불태우기도 했어요. 이 사건의 여파로 전차는 두 달간 운행을 멈췄으나, 계급·성별에 관계없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전차는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대중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전차 이용객이 많아지면서 운행시간도 야간으로 확대됐어요. 1900년 4월 10일 야간전차 이용객을 위해 종로네거리 인근 매표소 주변에 가로등 세 개를 점등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전기 점등이에요. 이를 기념해 우리나라는 1966년부터 4월 10일을 '전기의 날'로 제정했어요.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사업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뒤, 민간을 상대로 한 전등 사업도 시작했어요. 이는 발전소에서 밤새 생산되는 전기를 판매·소비할 좋은 방법이기도 했죠. 한성전기는 전등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발전소에서 보내온 전력을 가정·상업시설에 공급하는 배전시설 공사를 1901년 6월 17일 마무리 짓고 경운궁에 전등 여섯 개를 시험 삼아 점등했어요.
뒤이어 전등 사업을 홍보하고자 같은 해 8월 17일 저녁 동대문발전소 주변에 전등(아크등) 20개를 밝히는 전등개설의식을 열었는데, 군중 1만 명이 몰려 구경할 정도로 장안의 화제였죠. 이후 한성전기는 상업의 중심지였던 종로와 일본인 상가가 밀집한 진고개에 600여 등을 설치하고, 일반 가정에도 요금을 받고 전등을 설치하기 시작했죠.
전차·전등 등 전기를 이용한 신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대한제국의 풍경은 빠른 속도로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러일전쟁(1904~1905)으로 근대화를 향한 대한제국의 열망은 좌초됐어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통치기구인 통감부를 설치해 대한제국의 각종 근대화 정책과 이권을 가로챘죠. 근대화의 핵심 동력이었던 전력사업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전기와 우리나라 근현대사
"일본은 한반도 지배력을 강화하고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1909년 일한와사주식회사를 통해 한미전기회사를 인수했어요. 일한와사주식회사의 한미전기회사 인수 과정에서 한미전기 지분 절반을 가진 고종의 의견은 반영되지 못했고, 한국 최초의 전력회사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죠. 일한와사주식회사는 1915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어요." 일제는 이를 한반도 전력산업을 장악하는 토대로 삼았습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조선총독부를 세워 일본인 소유의 배전사업체 설립을 허가하고, 한반도 내 전력사업을 완전히 통제했어요. 또 전쟁에 필요한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을 육성하고자 수력발전소를 세우는 등 전기를 식민지 수탈과 침략 전쟁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했지만,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죠. 게다가 전력 생산시설의 대부분은 한반도 북부에 있었기에 남한은 분단 이후에도 전력 사용량의 약 70%를 북한에 의지했습니다.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일방적으로 전력 공급을 끊으면서 남한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어요.
곧이어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대한민국 국토가 폐허로 변하면서 발전소 등 전력설비도 파괴됐죠. 여기에 열악한 재정과 부족한 기술, 불안한 전황이 더해지면서 대한민국의 전력 생산은 더욱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그럼에도 전력설비 복구는 전쟁 중에도 이어졌죠. 1950년 9·28 서울 수복으로 서울에 복귀한 전력회사들은 즉시 긴급 복구작업에 나섰으며, 1951년 4월 들어 휴전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전력복구대를 편성해 전력시설 복구에 온 힘을 쏟았죠. 1951년 12월에 이르러 전기발전 규모는 6만5174kW를 회복했는데, 이는 전쟁 발발 직전의 남한 평균 전력에 가까운 수준이었어요.

지안 학생기자가 "현재 대한민국의 전력 공급을 책임지는 한국전력은 언제 탄생했나요"라고 질문했어요. "광복 이후 한반도 이남에는 조선전업·경성전기·남선전기가 전력공급을 책임졌는데요. 불안정한 정세와 전력난, 극심한 물가상승, 전력업체 경영난 등의 문제로 전기 3사를 통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국전력주식회사법안이 의결·공포됐고 1961년 7월 1일 한국전력주식회사가 탄생했죠. 1980년에는 한국전력공사법이 공포되며 정부가 전액 출자한 한국전력공사가 1982년 설립됐습니다."
한국전력은 출범 이후 전력 규모를 확대해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어요. 대표적 성과가 농어민에게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1965년부터 시작된 농어촌전화사업(The rural electrification project)이죠. 그 결과 1964년 12%에 그친 농어촌 전화율이 1979년 말에 이르러 98%로 가파르게 상승했어요. 전국 농어촌 275만5000호에 전기가 들어간 것이죠. 이를 통해 라디오·텔레비전과 같은 전자제품 사용은 물론, 하우스농사·가두리양식을 하거나 냉동창고 등을 들여올 수 있게 되면서 농가 소득 증대는 물론 농어촌의 생활 문화도 크게 바꾸었습니다. 마을에 전깃불이 처음 켜지는 날에는 으레 마을 잔치가 열렸죠.

1960년대 전기 공급이 확대 및 안정되면서 라디오·텔레비전·세탁기·냉장고 등 전자제품을 갖추는 가정집도 점차 늘었어요. 전국에 보급된 라디오는 1961년 말 100만 대를 돌파했고, 국산 흑백TV는 1969년 7만3000대를 생산할 정도로 산업이 성장했죠. 또 1965년 첫선을 보인 국산 냉장고와 1969년 개발한 국산 전기세탁기는 가사노동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1988년에는 88서울올림픽을 역대 최초의 무정전 올림픽으로 성공적으로 치르기도 했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1960~70년대 가정집과 전파사에서 볼 수 있었던 전자제품을 살펴봤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브라운관 텔레비전, 유선 전화기, 라디오 등이 있었는데요. LED TV와 스마트폰이 보편화한 지금과 비교했을 때 전자제품의 발전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었죠. 한편으로는 전기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체감이 됐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전기 소비를 감당하려면 전기를 많이 생산하는 일만큼 전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일도 중요해요. 우리나라는 원래 110V를 표준 전압으로 사용했는데 1973년 220V 승압이 결정됐어요. 30여 년 동안 노력한 끝에 2005년 11월 전국의 모든 가정용 전압이 220V로 승압했죠. 220V 승압을 통홰 전력 공급능력을 증대시키고 전력 손실을 줄일 수 있었어요. 우리나라 표준 전압인 220V에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있죠."

전기는 현대 인류 문명을 이룬 일등공신이지만, 화석연료에 의지하는 에너지 패러다임은 환경 위기를 불러일으키죠. 그래서 최근 전기 생산의 중요한 화두는 탄소중립이에요. 탄소중립은 인간의 활동에 의한 탄소 배출량은 줄이고, 대기 중으로 배출되는 탄소를 제거하고 흡수해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것을 말해요. 한국전력은 바다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하는 해상풍력,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 에너지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태양광 발전 관련 기술을 선도하고, 이산화탄소 포집·저장 및 활용기술(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CCUS) 등 탄소중립 핵심기술 확보해서 탄소중립과 재생에너지 확산을 도모하기 위해 노력 중이죠.
지금까지 국내 전기의 역사와 근대 전력산업, 한국전력의 창립, 1960~70년대 전력 생활부터 전력산업의 미래까지 살펴봤어요. 한성 도심을 달리던 전차부터 가전제품까지. 전기를 통해 우리의 생활이 획기적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죠. 현대 인류 문명의 원동력인 전기는 앞으로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할까요.
동행취재=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박건우(경기도 판교초 5)·서지안(서울 잠일초 6) 학생기자
우리나라 전기의 역사와 에디슨

전등·음향·전지·전화 등 전기 관계를 중심으로 한 특허로 유명한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1847~1931)은 우리나라 전기 산업의 발전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요. 고종이 보빙사절단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에디슨전등회사에 발전설비와 전등기기를 발주해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전등소(화력발전소)를 짓고 석탄을 때워 만든 증기로 전기를 생산·공급했기 때문이죠. 에디슨은 건청궁의 전등소를 중국·일본 등에 자사 제품을 판촉하기 위한 모범 사례로 시공했기 때문에 당시 아시아 일류시설로 구축됐어요.
1887년 에디슨전등회사의 총지배인 프랜시스 업턴이 에디슨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앞으로 일본 궁성에 설치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일류시설(only first class plants in the East)"라고 소개할 정도로 역작이었죠.
전기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전기의 힘으로 빛을 내며 손에 쥐고 쓸 수 있도록 만든 손전등, 전기 저항을 이용해 찻물을 끓이는 전기 차포트, 전기 저항을 이용해 공기를 덥히는 전기 난로, 전기를 이용해 의류의 주름을 잡거나 피는 다리미 등 1800~1900년대 에디슨사에서 만든 여러 전자제품을 실제로 살펴볼 수 있어요.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은 전기의 힘으로 작동되는데요. 이런 전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 전기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에디슨이 필라멘트 전구를 발명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고종이 살았던 건청궁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구를 사용해서 밤에 궁궐을 밝혔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회사인 한성전기가 전등 사업보다 전차 운행을 먼저 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죠. 건청궁의 전등 모형과 전차 모형도 보고, 당시 우리나라에서 전기사업을 한 보스트위크의 사진첩 속 100여 년 전 인물이나 풍경, 요즘 보기 어려운 1970년대 가전제품도 보니 재밌었죠. VR로 전기 관련 체험도 할 수 있었고요. 전기는 깨끗한 줄 알았는데 전기 생산 과정에 대기를 오염시키는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아끼면서 사용해야 할 것 같아요.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학생기자
국내 유일의 전기 전문 박물관인 전기박물관은 전기 역사에 관해 체계적이고 전문성을 띠어 좋았고 특히 역사책에 잠깐 나온 해리 라이스 보스트위크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 유익했어요. 대한제국 황실에서 출발한 한성전기를 통해 한성 안에 전차가 다니고 가로등이 거리를 밝혔죠. 한국전쟁 이후 세 개의 전기회사(발전소)를 통합해 지금의 한국전력에 이르게 되었어요. 요즘 한국전력에서는 국제 정세에 따라 가격 변동이 큰 석유·석탄·가스 등 대신 친환경 에너지를 사용하며 탄소중립까지 실천한다고 하니 자랑스러웠죠.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차였는데, 보스트위크 사진집에 찍힌 전차를 실제로 탑승할 수도 있어 더욱 재밌고 신기했습니다. 여러분도 전기박물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의 특별한 전기 역사와 그 미래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박건우(경기도 판교초 5) 학생기자
요즘에는 전기가 정말 흔합니다. 너무 흔해서 우리가 전기를 얼마나 사용하는지 모를 정도죠. 그런데 취재 후 전기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와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많은 사람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전기를 만들 때 환경오염이 많이 되기에 낭비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경복궁 건청궁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밝혀진 전깃불 설명을 들었는데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또 1879년 에디슨이 탄소 필라멘트를 개발하여 백열전구를 상용화한 지 불과 8년 만에 조선에 전기와 전등 시설이 설치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선진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노력했던 조상들의 노력에 감동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태양열 등 재생에너지의 단점을 개선해 비중을 더욱 늘렸으면 좋겠어요.
서지안(서울 잠일초 6) 학생기자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