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와 산책하다 보면 만나는 낯설고 다양한 것들, 아니, 존재들이 있다. 기억나는 첫째는 두꺼비다. 2019년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두꺼비는 밥알 얻어먹고 지네를 퇴치했다는 전래동화 때문인지 정감이 있다.
이 마을이 아직 휑했던 어느 날 미골공원 북쪽 산책로로 나갔는데 왕복 2차선 도로 위로 아기 주먹만 한 잿빛고동색의 뭔가가 엉금엉금 기어 오고 있었다. 건너편엔 마른 두왕천이었다. 털복이와 까망이가 냄새를 킁킁 맡더니 펄쩍 뒤로 물러서면서도 또 가까이 가길 반복했다. 두꺼비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그 정도 크기가 두꺼비 생애의 몇 주기쯤 되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커다란 인간의 눈엔 어쨌든 작은 생명체다. 비위가 약한데 무슨 정신으로 그놈을 집었는지 모르겠다.
마을이 개발되기 전 아버지 가마 근처에서 가끔 두꺼비가 엉금엉금 나타났다는데, 터주신이라고 여겼다던가, 여하튼 종종 먹이를 주고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었다. 마을이 밀려 나갈 때쯤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고 했는데, 난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 두꺼비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집 화단에 놓은 뒤에도 두 마리는 가까이 갔다가 뒤로 폴짝 뛰어 물러나기를 반복했는데 정말 두꺼비에게 독이 있어 그 냄새를 맡았던 건지, 아니면 신(神)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물과 밥알과 사료를 깨서 각각 그릇에 나란히 놔줬다. 늦은 밤까진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모습을 봤는데 다음 날 아침에 들여다보니 그릇은 깨끗이 비워지고 두꺼비는 보이지 않았다. 그릇은 들고양이들이 청소했을 거다.
두 번째는 2020년 2월쯤 공단 쪽 산책로에서 마주친 뱀이다. 작은 개천을 두고 길게 왕복하는 산책로인데 왼쪽으로 들어갔다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커다란 바위로 조경을 해둔 곳이고 해가 떠 있는 시간이면 볕이 내내 내리쬐는 곳이라 따뜻하다. 그래서 어지간히 춥지만 않으면 두왕동에서 가장 먼저 파릇파릇 싹이 올라온다.
들어가는 산책로 길이는 300미터쯤 되는데 그 중간 지점에서 똬리를 틀고 30센티쯤 대가리를 세운 아주 진한 녹색의 뱀을 봤다. 태어나서 뱀을 맞닥뜨린 건 그때가 처음이다. 까망이가 만으로 한 살도 안 됐을 땐데 칠렐레팔렐레 그쪽으로 펄쩍펄쩍 뛰어가길래 놀라서 들어 올린 뒤 털복이 목줄을 쥐고 뛰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뱀이 따라오지 못하게 지그재그로 뛰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뭔 소용이 있었을까 싶다. 줄에 매달린 털복이는 일자로 신나게 뛰었으니까. 촬영하다가 무릎을 여러 차례 다친 뒤로는 잘 뛰지 않는데 주인이 뛰어준 덕에 털복이는 드물게 신났을 테니까. 한동안 그 길로 잘 다니지 않았고 가더라도 그 길에서 더 이상 뱀을 본 일이 없다.
세 번째는 지난 1월이었다. 두왕천 근처에서 털복이와 까망이가 동시에 자세를 잡은 날이다. 그럴 땐 복권을 맞은 기분이 든다. 일타쌍피. 한 번에 닦아주고 치울 수 있으니까. 그런데 까악- 소리가 난다. 까마귀다. 난 까치보다 까마귀를 더 좋아한다. 전설이니 뭐니 그런 건 모르겠고, 까마귀 모양새가 색상 면에서 일관성이 있어 훨씬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까악- 소리를 내더니 가르르르르- 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얼른 올려다보니 가로등 위에 앉아 있는 한 마리가 까악- 가르르르르- 까악 가르르르르-를 이어서 내뱉고 있는 거다. 기형이다. 동물의 왕국, 동물의 세계 등에 무관심해서 동물 생태계를 정말 모른다. 하지만 그 까마귀의 소리는 무리에 득이 되지 않거나 해가 될 것이고, 그래서 따로 떨어졌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 마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덕분에 뒤처리를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많은 생각에 그 까마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떼고도 여러 번 뒤돌아봤다. 너, 외롭구나.
마지막으로 미골공원에 특이한 어르신 한 명이 있다. 공원 산책로 거리가 350미터쯤 된다. 내 개들은 이 산책로를 한 번에 두 바퀴 도는 법이 없다. 오늘 간 길을 내일 반복해서 가질 않고, 지금 지나간 길은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래도 가다가 멈추고 냄새 맡고 쉬하고 응가하고 이런저런 것들을 하다 보면 아무리 노인 걸음이라도 노인이 두 바퀴쯤 돌았을 때쯤에야 우린 반 바퀴쯤 돈다.
그 어른은 구부정한 자세로 넘어질 듯이 걸으면서 바로 앞에 사람이 있을 때까지 뭔가를 끊임없이 외친다. 제대로 들었던 단어는 예수님, 이 하나밖에 없다. 그 목소리는 기괴하다. 눈물이 가득 차서 출렁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2년 전쯤부터 보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깜짝 놀랐고 슬금슬금 피했다. 몸은 아니라도 마음은 그랬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한데 도통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여전히 기괴하다.
내막은 모르겠지만 그분은 사고든 병환이든 어떤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오고 움직이기가 불편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최소한 일흔은 넘겼을 것 같은데 최대한 살기 위해, 온전한 모습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너무나도 절박하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어느 날 그 어른이 안타까워지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최소한 200번은 봤을 텐데 그제야. 우리와 마주치기 5미터쯤 됐을 땐 얼른 목소리를 줄인다. 그리고 등지자마자 바로 절규 같은 목소리를 낸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조용히 등을 돌리고 딴청을 피우며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하는 일밖에. 아니지. 말을 걸어보고 대화를 나눠볼까. 아니다. 내 부모에게도 친절하지 못한 인간이 무슨. 지속하지 못할 일은 시작도 하지 말자. 그냥 조용히 응원만 하자.
이민정 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