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만5900명의 사망자와 2520명의 행방불명자. 지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동일본을 강타한 규모 9.0의 거대 지진이 남긴 상처다. 건물을 집어삼킨 14m가 넘는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福島) 제1원전 폭발. 11일로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꼭 14년이 된다. 후쿠시마원전 폐로와 함께 부활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후쿠시마현을 지난 2월 27일 찾아가 봤다.

“바나나 꽃 처음 봤지요?”
후쿠시마 원전에서 남쪽으로 약 30㎞ 떨어져 있는 히로노마치(広野町). 마을 회사인 히로노마치진흥공사 나가쓰 히로후미(長津弘文) 대표가 활짝 핀 꽃을 가리킨다. 바나나꽃이다. 그는 마을 공원 땅을 빌려 온실을 짓고 2018년부터 바나나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심은 바나나 묘목은 150그루. 매년 1만개에 달하는 바나나를 수확 중이다. 나가쓰 사장은 “마을을 어떻게 되돌릴지 고민하다 선택한 것이 바나나였다”고 했다. 대지진 전까지만 해도 5400명에 달하는 주민이 살았지만 지난해 3월 기준 이곳 인구는 4530명. 아직 10%의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다. 99.9%를 수입에 의존하는 바나나를 일본에서 생산하겠다는 꿈을 키웠지만, 사업은 적자다. 온실에서 자라는 바나나 하나에 들어가는 돈은 550엔(약 5300원). 하지만 판매 가격은 우리 돈 약 2000원대인 200~300엔이다. 그는 “팔수록 적자인 것도 과제지만 주민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를 조기에 치유하는 것이 큰 숙제”라며 “연간 1만5000명이 시찰을 위해 찾아오는데 지역민들에겐 이 방문이 감사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온실을 나와 후쿠시마 원전 인근 지역으로 향했다. 곳곳에 검은 대형 비닐로 덮인 흙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제염토(오염토)다. 일본 정부는 피난지시가 발령된 지역을 대상으로 오염된 토양을 5cm 깊이로 긁어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렇게 생겨난 제염토를 원전 인근의 후타바마치(双葉町) 등에 세운 중간저장시설에 쌓아두고 있다. 쌓아둔 제염토는 올 1월 기준 1406만㎥. 수영장으로 따지면 25m 길이 수영장의 2만8000개, 도쿄돔 11배에 달하는 양이다.

일본 정부는 방사선 피폭량이 연간 50 밀리시버트(mSv)를 넘는 구역은 거주는 물론 출입도 어려운 귀환곤란구역으로 지정해 관리해왔는데, 토양 제거 작업을 벌이면서 2022년부터 귀환곤란구역을 점차 해제하기 시작했다.
환경성 안내에 따라 110곳의 중간저장시설 중 한 곳으로 향했다. 환경성 관계자가 안전모와 장갑, 방사선 측정기를 나눠줬다. 현장에서 측정한 방사선량은 시간당 0.291 마이크로시버트(μ㏜·1밀리 시버트의 1000분의 1). 주대한민국일본대사관이 매일 X(옛 트위터)에 올려놓는 공간 선량률에 따르면 서울(지난 7일 기준 0.125μ㏜)보다 높은 수치다. 하지만 국제 방사선 물질 노출 허용량(연간 1mSv)을 근간으로 일본 환경성이 제시한 기준치(시간당 0.23μ㏜)에 비하면 다소 웃도는 수준이었다. 환경성 관계자들은 후쿠시마현에서 모은 제염토가 이곳에 쌓여있다고 설명했다. 침출수가 새어 나오지 않게 보호 매트→방수시트→물을 흡수하는 벤토나이트 매트→전도성 매트→방수시트→보호 매트 순으로 덮어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이 바라다보이는 지역으로 이동했다. 길가엔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반파된 집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쿠마마치(大熊町)에 있는 선라이트에 도착하자, 유리창 사이로 이리저리 넘어진 의자들과 담요, 옷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황급히 대피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은 14년전만해도 마을 어르신들의 요양시설이었지만, 지금은 환경성이 중간저장시설 현황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됐다. 안내에 따라 가설 계단을 올라가니 후쿠시마 원전 인근에 쌓아둔 제염토 무더기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가사키 고(戸ヶ崎康) 환경성 기획관은 “큰 제염작업은 끝나 중간저장 시설에 반입했지만 앞으로도 작은 부분들을 제염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해 당시만 해도 후타바마치와 오쿠마마치에 살았던 이들은 약 2700명. 하지만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이들은 고향을 떠났다. 귀환곤란구역이 되어버린 고향땅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은 중간저장시설사업을 위해 집터와 마을을 제염토 저장 장소로 내줬다. 도가사키 기획관은 “후타바 지역도 귀환곤란구역이었지만 제염을 하면서 재작년부터 돌아올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염작업이나 건물 건설을 위해 찾아온 인부들이 대다수일 정도로 실제 주민의 복귀는 많지 않다.
두 마을에 걸쳐 쌓여있는 제염토는 일본 정부의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일본 정부는 2045년 3월까지 후쿠시마현 밖에서 최종적으로 처분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하지만 도쿄돔 11개 분량의 제염토를 수도권 등 후쿠시마현 밖으로 내보내 사용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주민 반발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근 후타바마치는 이 제염토를 후타바마치에 먼저 사용하겠다는 의향을 내보이기도 했다. 수도권 등 타지역에서 사용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환경성은 후쿠시마현에 만든 도로 건설 실증사업 현장으로 안내했다. 제염토는 농도에 따라 분리하고, 열처리, 흡착처리 등의 과정을 거쳐 재이용이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데, 이를 활용한 것이다. 높이 5m, 폭 8m의 2차선 도로와 폭 2.5m의 도보를 상정한 도로가 실증 대상. 한쪽엔 침출수를 관리하고 검사하는 시설이 붙어있다. 안전성 검사를 위한 것이다. 도로 외에도 2021년부터 제염토를 농지조성에 사용하는 실증사업도 진행 중이다. 사료용 옥수수 등을 심어 안전성 검증을 하고 있다. 도가사키 기획관은 “제염토를 어디서 사용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라며 “올해 기준을 제대로 만들어 의미를 설명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