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세대의 투혼

2024-09-30

가을이 추억과 함께 오는 것은 아무래도 나이가 든 탓이다. 스쳐 지나던 꽃들과 스산한 나뭇잎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니 알겠다, 젊음이 귀하다는 것을. 기운과 의욕이 남아 있으나 받아 주는 곳은 드물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도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가끔 단톡방 알림 소리에 마음이 들뜰 뿐.

한국의 60대, 사회의 주요 전선에서 이미 퇴각한 1차 베이비부머 세대(1955년~1963년생)의 일상이 이러하다. 이들은 무려 763만 명, 총인구의 17%다. 한국의 자산이 대부분 6070에 쏠려 있다는 통계가 시기와 부러움을 사기도 하는데 세대 ‘내’ 불평등을 고려하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작은 아파트 하나 지키면서 퇴직금과 경로연금으로 사는 사람, 복지사, 보호사, 파출부로 뛰는 사람, 노포(老鋪)에 노후를 거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들이 ‘삼(三) 세대 돌봄’의 주역이라는 사실, 전무후무한 공무(公務)를 말없이 수행하는 세대임을 사회는 알아주지 않는다.

산업 공단 주력부대 베이비부머

제조업 강국으로 끌어올린 그들

가족·부모·손주 삼세대 돌봄 감당

자신은 누구의 짐 되지 않을 궁리

저출생 탈피를 위한 각종 정책이 난무해도 육아의 최후 전선엔 이들 베이비부머가 있다. 이들은 손주 출산 후 적어도 2년 동안은 자신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손주를 본다는 ‘기쁨’을 손주 돌봄의 ‘세대 업무’로 치환한 최초의 세대이지만 부모 봉양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손주는 울고, 부모는 중증질환 투병인 상태를 어쨌든 해결해야 한다. 버겁고 두렵다. 이런 베이비부머 세대를 다시 일으키는 힘은 젊은 날의 기억이다. 가난을 딛고 올라선 힘, 굉음이 울리는 공장에 쏟은 젊은 날들 말이다.

1차 베이비부머는 한국 제조업의 일등 공신이다. 막 터를 닦은 신설 공단엔 청춘이 넘쳤다. 1976년 구미공단 여공의 평균연령은 20세, 임금은 6만원이었다. 수만 명이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대학생이던 필자가 현장 조사차 구미공단을 방문했던 그 날 어느 여공이 말했다. 3만원은 생활비로 쓰고, 3만원은 집으로 보낸다고. 부모, 동생 돌봄이 그렇게 시작됐다. 1982년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청춘 직공 수만 명이 밤새워 일했다. 구미공단은 전기제품을, 마산공단은 반도체를 생산했다. 이후 이들은 울산, 포항, 거제, 창원, 여수 산단으로 이동해 6대 전략산업의 거대한 인력을 형성했다.

자나 깨나 성장의 망치 소리가 들렸던 시대에 기회는 널려 있었지만,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공돌이, 공순이가 역사를 개척한 시대였다. 베이비부머 60%가 노동현장에 투입됐다. 중동(中東)으로 달려가 외화벌이의 막내 전사가 된 이들도 그들이다. 그렇게 끌어모은 종잣돈으로 가내공장을 열어 소(小)사장이 된 공돌이가 넘쳐났고, 소위 ‘삼순이’(공순이, 식모, 여차장)들은 식당, 다방, 점방의 억척 여사장으로 변신했다. 빈곤 탈출과 가족생계를 위한 투혼이 오늘날 K음식, K상품, K반도체 신화를 탄생시킬 거라고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물론 그 최전방에 물불을 가리지 않은 정경(政經)연합이 있었지만, 한국을 일본, 독일, 중국에 견줄 만한 강국으로 밀어 올린 원천적 인적 자본은 바로 베이비부머다. ‘자신의 영달’ 속에 부모봉양과 자녀 양육을 욱여넣고, 이제는 손주 돌봄까지 선뜻 자임한 최초의 세대.

필자는 얼마 전 베이비부머의 그런 뚝심을 묵묵히 지키는 현장을 목격했다. 1970년대 중반 명문 대학을 졸업한 그는 유망한 직장을 마다하고 창업을 결단했다. ‘창업’이란 개념이 낯설었던 당시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기계공학이 전공인 그에겐 절삭공구(cutting tools)가 애인처럼 다가왔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작은 창고에서 창업을 선언했다. 양지원, 1982년이었다. 창고에서 절삭공구가 깎이던 시각, 그는 제품을 들고 미국과 유럽을 쏘다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고 모텔에서 잠을 잤다. 위험천만한 순간을 여럿 겪었지만 고객을 찾지 못하는 위험보다는 덜했다. 절삭공구는 쇠에 구멍을 뚫는 도구, 강철보다 더 내성이 강해야 한다. 기계설비는 자신이 직접 설계 제작했다. 지금은? 생산품이 10만 가지에 달하고, 전 세계 26개국에 33개 지사를 설치했다. 고용은 국내 1600명, 해외 5500명, 독일 호프만(Hoffmann)과 아르노(ARNO)사, 미국 보잉(Boeing)사가 주요 고객이다.

그가 안내한 작업 현장에는 MZ세대가 넘쳤다. 직원 한 사람이 십여 대 생산 설비를 관리하는데, AI를 접목해 20대로 늘리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세대 임무’라고 했다. 직원 일인당 생산 가치가 늘어나고 월급도 올라 ‘아랫세대 돌봄’의 기반을 완료할 수 있단다. 양지원(養志園)을 영어표기로 YG1-너의 인생을 위한 글로벌 넘버원-으로 설정한 필자와 동명이인 송회장의 각오다. 자신의 마지막 임무라는 그의 말이 ‘삼 세대 돌봄’을 감당하는 베이비부머의 투혼을 떠올리게 했다. 세대 돌봄을 완수하고 곧 퇴장할 베이비부머는 자신만은 누구의 짐이 되지 않을 방안을 궁리 중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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