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어요

2024-10-03

안개가 마을에 가득했어요. 강 건너가 잘 보이지 않았답니다. 천천히 걸어 강을 건너갔어요. 어제 그곳에 가보려구요. 틀림없이 알밤이 길바닥에 많이 떨어져 있을 거거든요. 길에는 어제 보았던 민달팽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제 그 달팽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민달팽이는 어찌나 느린지 가는지 마는지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민달팽이를 볼 때마다 생각나는 내 말은 늘 같습니다. ‘민달팽이에게 도달은 의미가 없다.’ ㅡ 졸시 ‘도중’ 전문-. 억새가 팼습니다. 감도 익어갑니다. 길가에 미국 쑥부쟁이꽃이 피어 있고 고마리, 물 봉선화 꽃이 피었습니다. 거미들이 길가 풀숲 여기저기 집을 지어 놓았습니다. 길목이 좋은 곳에 있는 거미 집에는 날 벌레들이 여러 마리 걸려 있고, 내가 보기에 별 고민도 별생각도 없이 얼기설기 허술하게 지은 듯한 집에는 거미줄이 텅 비어 한산합니다. 거미들도 집을 지을 때 부실 공사를 하는가 봐요. 꾀꼬리, 붉은 머리 오목눈이, 개개비, 박새, 직박구리, 딱따구리, 까치들이 안개 속에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새들의 아침도 사람들의 아침 출근길 만큼이나 부산합니다. 차가 한 대 내 뒤에 오고 있었습니다. 긴장했어요. 차가 자주 다니지 않은 좁은 길이거든요. 처음 본 차였습니다. 민달팽이 생각이 났습니다. 차는 그 지점을 이미 지나와 버렸습니다. 저기 저 앞길에 알밤들이 떨어져 있을 텐데, 어쩐다지, 어쩐다지 하다가 손을 번쩍 들어 차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사정을 이야기했지만, 그분은 바쁘다며 그냥 가버렸습니다. 내가 길바닥에 있는 밤을 줍는 1분만 늦추면 안 되겠냐고 했거든요. 알밤이 있는 길을 지나자, 생 밤이 차 바퀴에 갈려 툭툭 터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바삐 걸어가 보았습니다. 여기저기 속살이 하얗게 터진 알밤들이 보였습니다. 용케 ‘로드 킬’을 피한 알밤을 주웠습니다. 길바닥에 있는 알밤 만 주워도 두 손이 가득 차서 왼쪽 호주머니에 넣고 풀 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여기저기 알밤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알밤나무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알밤 송이들이 벌겋게 벌었습니다. 알밤나무를 발로 차면 알 밤들이 후두두 이슬 밭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알밤이 하도 많이 떨어져 있어서 알밤 밭 같습니다. 정신없이 알밤을 주울 때, 여기도 툭 저기도 툭 내 코앞에도 툭 떨어지네요. 금방 땅에 떨어진 알밤은 정말 탱글탱글 예쁩니다. 어쩌면 저렇게 밤이 저절로 익어 벌어지며 땅으로 툭툭 떨어지는지 정말 신비롭습니다. 금새 왼쪽 호주머니가 가득 찼습니다. 어찌나 알밤이 많은지 금방 오른쪽 주머니도 가득 찼습니다. 나도 놀랐습니다. 바지 양쪽 주머니가 터질 정도로 가득 찼어도 땅에 떨어진 알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습니다. 아깝지만 더는 어쩔 수 없습니다. 주머니에 더는 들어가지 않아 양손에 알밤을 들고 집으로 갑니다. 주머니 가득한 알밤의 무게로 바지가 자꾸 내려가 걷기가 불편해집니다. 아까 그 차는 아직 돌아 나가지 않았습니다. 이 길은 차가 더 갈 수 없는 막다른 소로 길이거든요. 민달팽이가 있던 곳을 지나갔습니다. 민달팽이 맨몸이 사라진 흔적이 길바닥에 뚜렷했습니다. 민달팽이는 죽으면 물이 되어 버립니다. 뼈와 살이 없어요. 안개가 사라진 말끔한 아침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산이 정갈합니다. 낮달이 가고 있네요. 달도 민달팽이처럼 가기는 가는데, 지구의 움직임처럼 체감하지는 못합니다. 노란 꾀꼬리가 강을 건너 하늘 높이 날아갑니다. 어젠지, 그젠지 문득 우리 살갗에 와 닿던 그 선선하던 바람이 새삼스러웠었습니다. 그 바람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온 바람이기에 어제와는 다른 바람이었는지, 그 바람은 잊어서는 안 될 바람이었습니다. 우리 입에서도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날이 달라졌다고, 이제 좀 살겠다고, 바람이 하는 말을 알아들은 것입니다. 내 생각이 달라지다니, 내 말이 달라지다니, 자연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고 다른 말을 하다니, 우리가 놀랍지 않아요?

/김용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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