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불러온 북한의 ‘안러경중’ 시대

2025-09-03

이재명 대통령은 얼마 전 미국에 가서 북한을 ‘가난하지만 사나운 이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즉각 ‘심한 모독’이라며 격노했지만, 여러모로 이 말은 맞는 말이다.

먼저 북한은 가난하다. 지난달 한국은행이 유엔 추계 방식에 따라 내놓은 ‘2024년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 결과’ 보고서를 보면 북한의 지난해 국민총소득(명목 GNI)은 약 44조4000억원이다. 한국(2593조8000억원)의 58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총소득은 171만9000원으로, 한국(5012만원)의 29분의 1이다.

‘가난하지만 사나운 이웃’ 북한

시진핑·푸틴과 천안문 망루 올라

중·러 밀착 편승, 입지 강화 노려

다만, 북한 경제는 2023년(3.1%)에 이어 지난해 3.7%로 2년 연속 성장했다. 한은은 우크라이나 전쟁 파병으로 북·러 협력이 강화되면서 제조업, 건설업, 광업 분야가 성장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그중 제조업은 무기류 수출 증가 등에 힘입어 지난 1999년(7.9%) 이후 25년 만에 가장 높은 성장(7.0%)을 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특수가 활력을 잃은 북한 경제에 일부 숨통을 터주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북한의 대외 교역 규모를 보면 지난해 27억 달러로, 전년보다 2.6% 줄었다. 수출과 수입 모두 줄었다. 주요 대외 창구인 중국과의 교역이 줄어든 영향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사납기도 하다. 중국 전승절을 맞아 베이징을 찾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방중에 앞서 군사시설 두 곳을 방문했다. 지난달 31일 새로 조업을 시작한 군수 기업을 찾아 미사일 자동화 생산 공정을 둘러봤다. 다음 날인 1일엔 미사일총국 산하 연구소를 방문해 탄소섬유 복합재료와 추진력이 40% 강화된 미사일 엔진 생산을 독려했다. 이 엔진을 활용해 조만간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 시험 발사에 나설 것을 예고했다. 주목할 대목은 탄도미사일 제작에 가볍고 내구성이 강한 탄소섬유를 사용했다는 점. 러시아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3차 우크라이나 파병을 앞두고 러시아와의 안보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는 또 다른 방증이다. 이 대통령은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 체제를 존중하고, 흡수 통일도 하지 않으며, 적대 행위를 할 의사도 없다고 했는데, 북한은 사납게도 한·미·일을 향한 핵·미사일 위협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어제 천안문 망루에 오른 김 위원장의 행보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지만, 북한의 ‘안러경중’(안보는 러시아, 경제는 중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으로 보인다. 가난한 북한 경제는 전례를 볼 때 중국의 지원을 통해서 회복될 수 있다. 러시아 파병을 통해 얻은 에너지·식량 지원 등 경제적 이익만으로는 경제 회생에 한계가 있다. 당장 올해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행사와 내년 노동당 9차 대회를 성대하게 치르려면 중국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중국은 지난해 북·러 신조약 체결과 러시아 파병 이후 북한과의 경제·사회적 교류를 줄였다. 중국 내 북한 근로자 철수를 요구했고, 대북 직접 투자를 금지했다는 소식도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번에 김 위원장의 방중이 성사된 것을 보면 중국도 북한 경제 지원에 나서기로 결심한 듯하다.

러시아와의 안보 협력은 당분간 탄탄대로일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북·러 관계가 소원해질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전망을 하고 있다. 하지만 미·중 전략경쟁 시대를 맞아 북·중·러 연대가 강화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과거 핵 비확산을 중시했던 중·러가 북한을 ‘전략적 부담’으로 여겼다면, 함께 미국에 맞서는 현 상황에선 오히려 ‘전략적 자산’으로 간주할 수 있어서다.

이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더이상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은 없다고 선언했다. 미·중 균형 외교를 중시하는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도 대놓고 하기 어려운 친미 성향의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는 북한이 안러경중의 균형 외교에 나서고 있다. 북한은 과거 김일성·김정일 체제에선 중·러 등거리 외교로 여러 차례 재미를 봤다. 차이가 있다면 예전에는 중·러 갈등을 활용했다면, 이번엔 중·러 밀착에 편승했다는 점이다.

베이징 망루 외교를 마무리한 김 위원장은 다음 수순으로 노벨평화상에 눈독 들이고 있는 ‘피스 메이커’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것 같다. 10월 말 트럼프 대통령의 경주 APEC 정상회의 참석 때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리는 호시절이 올 때가 있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주듯 호시절도 언젠가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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