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뜨거운 여름이 지나간 뒤의 마음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과일처럼 잘 익었을까. 혹시 화상을 입진 않았을까.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썩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대관령으로 가는 동안 이런 생각들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까닭은 나의 지난여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변명이 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끌어와 보았는데 울화가 사라지기는커녕 왠지 나를 합리화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쓰는 것만 같아 씁쓸했다. 고향으로 향하는 것 역시 그런 복잡한 심사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보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복잡한 심사 달랠 때 찾는 고향
돌배 안 열렸지만 사과는 풍성
늘 같은 엄마 당부 “조심하시오!”

대관령 고향집에 가면 계절에 상관없이 먼저 집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화목 보일러실, 소가 사라진 지 오래된 외양간, 내 몸보다 큰 단지가 있는 고방(庫房), 어린 시절 여섯 식구가 살던 뒷마당의 낡아가는 옛집, 뒷마당의 사과나무 두 그루와 샘물 옆 그늘이 넓은 돌배나무….
계절 중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당연히 여름이다. 가을엔 울타리 안과 바깥에서 자라던 식물들이 물든 뒤 말라가는 잎을 떨구느라 스산하다. 마른 가지나 옥수숫대 사이로 불어온 바람은 그 잎들을 마당 곳곳으로 쓸고 다니느라 한밤중에도 소란스럽다. 때론 빈 양동이를 굴리기도 한다. 그리고 눈이 내린다. 발목을 덮어버릴 정도로 눈이 내리면 뒷마당엔 사람의 발자국이 사라지고 간혹 산에서 내려온 고라니나 새의 발자국만 찍힌 채 얼어간다. 눈과 얼음이 녹은 흙탕물이 개울로 흘러가는 봄날은 울타리 안팎을 청소하느라 바빠진다. 깍쟁이(갈퀴)와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 담아도 검불은 나오고 또 나온다. 엄마는 그 자리에 다시 강낭콩과 옥수수 씨앗을 심는다. 물론 꽃은 씨앗을 뿌리지 않아도 딱딱한 흙을 뚫고 싹을 틔운다. 봄볕을 등에 업은 돌배나무와 사과나무도 덩달아 연분홍 꽃잎을 가지마다 펼쳐놓는다.
올해는 돌배가 열리지 않았다. 봄날 수정이 되기도 전에 바람이 세게 불어 꽃잎이 모두 떨어졌거나 냉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돌배술을 담글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밤 고향집 거실에 형제들이 둘러앉아 마시는 돌배술이 일품인데…. 다행히 뒷마당의 사과는 잘 열렸다. 하지만 사과는 봄날 열매를 제대로 솎아주지 않아 너무 많이 달렸다. 가느다란 가지가 열매의 무게를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할 수 없이 버팀대를 세우고, 다른 가지 아래론 밧줄과 각목을 얼기설기 엮어 휘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도록 대비하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일을 끝내고 사과나무 아래에 앉아 하늘을 보니 나름 아름다웠다. 윗부분이 발갛게 물든 사과를 보니 내 마음도 콩닥거렸다. 더운 마음을 식히는 데엔 차가운 캔맥주가 제격이었다. 한 달 정도 지나 추석이 찾아오면 온통 붉은 사과가 고향집을 찾아온 가족들을 반길 것이다. 그 사이에 태풍이 말썽을 부리지만 않는다면.
다시 울타리 안과 밖을 기웃거렸다. 은은하고 수수한 보라색, 흰색 꽃이 어우러진 도라지는 한데 뭉쳐서 자라기에 웬만해선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 사과나무 아래의 곰취와 나물취, 잔대, 참나물이 피워올린 꽃을 보면 신기하게도 봄날 맛있게 먹었던 산나물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매년 봐도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옛집의 처마 밑 빗물이 떨어지는 부뚜막 옆에서 부지깽이에 의지해 자라는 봉숭아 한 송이는 왠지 애처롭다. 뽑아버리지 않고 남겨둔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뒷마당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개에게 먹일 죽을 끓이다가 쓰러진 봉숭아를 발견하고 부지깽이를 옆에 꽂아 일으켜 세워준 것일까…. 울타리를 타고 자라는 건 호박과 더덕 넝쿨이다. 그 사이사이 메꽃과 나팔꽃이 홍색·보라색 꽃을 피웠다. 머루 넝쿨도 울타리를 덮었는데 올해는 돌배처럼 열매를 맺지 못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
고향집의 마당과 대문 밖을 물들이고 있는 건 키가 큰 해바라기꽃이다. 일부러 심은 게 아닌데 매년 꽃이 늘어난다. 이번엔 해바라기 그늘에 앉아 캔맥주를 마셨다. 왕벌과 참벌이 해바라기꽃을 기웃거렸다. 나비도 너풀거렸다. 텃밭에 감자를 캐러 나갔던 엄마가 흙 묻은 감자를 담은 유모차를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개들이 멍멍 짖었다. 닭장 안의 닭들이 꼬꼬댁, 꼬꼬꼬 노래하며 맴을 돌았다. 대관령의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마음에 나팔꽃 같은 멍이 들면 어김없이 고향집을 찾아왔다. 찾아와 며칠 말없이 쉬다가 떠날 때 등이 구부러진 미륵 같은 엄마는 늘 같은 당부를 했다.
“조심하시오!”
김도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