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일 떠맡고, 쉴 때도 호출 대기··· 보건의료 노동자 절반 “내 권한 밖 업무 하고 있다”

2024-07-02

“난동 부리는 환자를 제압하다보면 그 과정에서 간호사가 맞는 경우도 많죠. 교수님이나 ‘씨큐리티’(보안요원)가 올 때까지 환자가 누구를 때려도 제압할 방법이 없어요.”

대형병원에서 15년 넘게 근무한 간호사 A씨는 지난 2월부터 일터에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늘었다. A씨는 정신과 안정병동(폐쇄병동)에서 근무한다. 이곳에서는 환자들이 갑자기 발작이나 흥분상태를 보이는 ‘액팅 아웃’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때는 의료진이 와서 현장에서 환자 상태를 보고 주사 처방을 내려 약물로 제압해야 하는데, 지난 2월 중순 정신과 전공의 8명이 모두 의료현장을 떠나면서 주사 처방을 할 수 있는 의료진의 수가 크게 줄었다. A씨는 “저희(간호사들)가 볼 때 위험해보이는 환자가 있어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교수님이 워낙 바쁘니까 상태보고를 하는 것조차 어려울 때가 많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이 올해 1~2월 실시해 3일 공개한 ‘2024 보건의료노동자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A씨처럼 일터에서 최근 1년 내 폭언·폭행·성폭력 중 하나라도 경험했다는 응답자가 10명 중 6명(60.9%)이나 된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연장 근무, 적은 휴게시간 등 열악한 노동환경에 놓여있었다. 특히 대형병원에서는 지난 2월 전공의들이 의료현장을 대거 이탈하면서 노동환경이 더 악화됐다.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많이 일하고, 적게 쉬었다. 실태조사 응답자의 61.6%가 매일 평균 30분 이상 연장근무를 했다고 답했다. 10명 중 1명(10.5%)은 매일 90분 이상 연장근무를 했다. 응답자의 3분의 1(33.1%)은 하루에 휴게시간이 전혀 없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52.9%)이 한 주에 한 번 이상 식사를 거르고 있다고 했으며, 그 횟수가 5회라는 응답자도 11.0%나 됐다.

보건의료 직종 종사자들은 생명과 직결된 일을 하는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법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돼있다. 하지만 전체 응답자의 절반 가량(47.3%)이 ‘나의 권한과 책임을 벗어난 타 직종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답했다. ‘본인의 담당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55.8%), ‘업무량이 근무시간 내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다’(39.9%)고 답한 비율도 높았다. 간호직 종사자의 경우 ‘타 직종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응답률이 평균보다 10%포인트 높은 57.4%였는데, 전공의 없는 의료현장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A씨는 “‘잔뇨량 검사’의 경우 보통 인턴 선생님들이 하는데, 이들이 없으니 간호사들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잔뇨량 검사는 방광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보기 위해서 방광 내 남은 소변의 양을 초음파 기계로 확인하는 검사다. 원칙대로면 간호사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업무다. A씨는 “병원에서 전공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고참 간호사 위주로 PA 간호사(진료보조 간호사)들을 뽑아갔다”면서 “의사들이 해야 하는 업무가 간호사들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커져 걱정된다”고 말했다.

쉴 때도 항상 대기상태… “근무는 아니지만 부르면 1시간 안에 와라”

보건의료 노동자들은 쉴 때도 마음 편히 쉬지 못했다. 응답자의 14.2%는 ‘퇴근 이후나 휴무일에 돌발·응급 상황으로 인한 업무요구로 일터로 돌아와야 했다’(최근 3개월 이내 경험)고 답했다. 응답자의 39.2%는 ‘퇴근 이후나 휴일에 SNS 등을 통한 온라인 업무지시를 받았다’고 했다. 특히 사립대병원, 국립대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직군에서 돌발 업무복귀 경험이 많았다.

대형병원 수술방에서 일하는 9년차 간호사 B씨는 전공의 공백으로 인해 이같은 상황이 더 심해졌다고 전한다. 수술실 근무 간호사들은 통상 두 명이 한 조를 이뤄서 일한다. 한 명이 수술에 들어가면 다른 한 명이 밖에서 멸균작업을 하거나 환자 상황을 전달하는 등 ‘백업’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어진 의·정갈등으로 경영난에 처한 병원이 새로 사람을 뽑지 않아 ‘2인 1조’ 원칙이 깨졌다. B씨는 “한 명이 근무를 하던 중에 응급수술이 잡히면 나머지 한 명에게 응급콜을 할 테니, 휴무일이더라도 1시간 안에 병원에 오라고 한다”며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퇴근해서도 계속 콜을 기다리니 마음 편히 쉴 수도 없고, 대기 시간은 근무로 쳐주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현재 인력수준이 적정하다’고 답한 비율은 26.1%에 불과했다. 인력 부족으로 인해 임신 중에도 과도한 업무는 계속됐다. 최근 3년 이내 임신, 출산을 경험한 여성 노동자의 39.0%가 ‘임신 중 초과 노동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임신 중 야간 노동을 했다’고 한 경우도 19.1%였다. 임신, 출산 경험자 중 4명에 1명(25.4%)은 ‘동료나 선후배,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하는 시기에 자유로이 임신을 결정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로 ‘인력부족으로 동료에게 업무가 가중되는 점’(73.8%)을 꼽았다. 최근 3년 내 유산·사산을 경험한 여성 응답자 중 23.3%가 ‘법정 휴가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이같은 어려움들 때문에 보건의료 노동자 3명 중 1명(64.6%)이 ‘이직을 종종 생각하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전체 응답자의 78.9%가 ‘내가 하는 업무에 자긍심을 느낀다’고 할 정도로 자신의 일을 높이 평가하지만, 과도한 업무 부담 때문에 이직 욕구도 높은 것이다. 간호사 B씨는 “일이 힘들더라도 환자가 딱해서 더 열심히 할 때가 많고, 사명감도 늘 느끼고 있지만 야간 근무 후에 바로 출근하거나 호출 대기 상태로 있다보면 누가 내 고생을 알아주느냐는 마음에 지치곤 한다”고 말했다.

이번 실태조사는 보건의료노조가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에 의뢰해 진행됐으며 지난 1~2월 총 4만760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보건의료 직종의 특성상 응답자의 다수(81.4%)가 여성이다. 응답자는 간호직, 보건직, 기능직·운영지원직, 행정직 등 다양한 직군으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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