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시대적 과제
4회 - 공동체 정신 되살려야
고도성장 이뤄내고 문화강국 됐지만
고독사·은둔청년 늘고 이념갈등 심각
악플·가짜뉴스에 참사 유족마저 고통
‘서로 돕는 이웃’ 인식 갈수록 희미해져
금 모으기 운동·거리두기 동참 재조명
“연대 기억 적극 공유·제도 뒷받침 필요”
세계적으로 드물게 초고속 압축성장을 통해 대한민국은 10위권 경제대국의 자리에 올랐다. 근래 들어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그리고 BTS·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팝 등으로 문화강국 이미지 또한 쌓아올리고 있다. 2018년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 인구 5000만명 이상인 ‘30-50 클럽’에 7번째 나라로 가입하면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국민의 자부심이 컸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대한민국의 공동체 정신을 허무는 ‘독버섯’도 함께 자랐다. 타인에 대한 배려, 관용은 옅어지고 ‘내 가족 이기주의’ ‘부족주의’와 같은 균열이 깊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를 분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실업, 파산 등 경제적 어려움으로 가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물질만능주의가 확산하면서 ‘각자도생’ 문화가 굳어지고, 사회의 도덕·윤리성·품격과 같은 무형적 가치는 평가절하하는 계기가 됐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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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붕괴의 징후
한국 사회의 공동체 붕괴 징후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가구의 40%를 넘어선 가운데, 독거노인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은둔·고립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반지하나 고시원 등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는 고독사가 늘고, 청년 1인 가구 상당수가 ‘사회적 단절’을 호소하고 있다는 조사도 잇따른다. 이는 ‘서로 돕는 이웃 공동체’가 약화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한국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사망자 수)은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10월 발표된 2023년 자살률은 10만명당 27.3명으로 전년 대비 2.2명(8.5%) 증가했다. 이는 OECD 평균(약 11명)을 크게 웃도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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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국민 30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4년 사회정책 국민 인식조사’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된다. “우리 주변에는 사회나 타인으로부터 고립된 사람이 많다”는 문항에 응답자의 74.0%가 ‘(매우) 동의한다’고 답했다. ‘우리나라 사회통합 수준’을 10점 만점 척도로 평가한 결과는 평균 5.10점에 그쳤다.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주요 요인으로는 △소득·성·지위 등 불균형과 사회적 격차(63.8%) △빈곤·실업 등 경제적 자립 어려움(59.8%) △신뢰 저하 및 공정성 불신(46.3%) 등이 꼽혔다. ‘위기 상황에서도 함께 대응·극복하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고 분절된 방식이 남았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사회통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는 극단적 정치·이념 갈등이 빠지지 않는다. 온라인 공간을 비롯해 각종 사안에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뉘는 현상이 반복되며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심화하고 있다. 가족·지인 관계마저 이념 차이로 분열되는 경우가 늘면서, 다양한 갈등이 공동체 해체를 더욱 가속화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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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기본 책무인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국민 체감도는 매우 낮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4 국가이미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사회적 약자를 잘 돌보는 나라”라는 명제에 대한 평가에서 해외 25개국(1만2500명) 응답자 점수 평균은 100점 만점에 65.6점이었지만, 정작 한국인(500명)이 스스로 평가한 점수 평균은 50.4점에 불과했다. 보고서는 이를 “약자 보호에 대한 부정적 체감”으로 해석하며 “공동체 정신 저하 및 배려·포용 부족과 연결된다”고 분석했다. 사회적 약자 보호 점수가 다른 항목(성숙한 시민의식, 다양한 문화 수용, 민주주의 발달 등)보다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은 그만큼 관용, 연대 의식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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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불신 키우는 사이버 공간
스마트폰 등장 이후 온라인 공간이 사회 이슈를 좌우하게 되면서 부작용도 커졌다. ‘익명의 공간’에서 가짜뉴스를 퍼뜨리거나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악성 댓글로 인한 피해 사례가 잇따르고 가짜뉴스가 낳은 이념·정치 갈등이 극심해지면서 우리 사회 신뢰를 무너뜨리는 주범으로 온라인 플랫폼이 지목되기도 한다.
최근 2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배우 김새론은 대표적인 악성 댓글 피해자다. 아역 배우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배우 생활을 시작한 김새론은 2022년 음주운전 사고 이후 여러 차례 작품 활동으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싸늘한 비난 여론에 휩싸여 재기하지 못했다. 고인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진이 실시간 기사화되며 음주운전 전력이 재차 공개됐고, 생업을 위해 카페에서 일하는 과정에서도 목격담과 함께 조롱 섞인 비난이 뒤따랐다. 고인은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지인들에게 고통을 호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3년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배우 이선균도 생전 피의사실과 관련한 각종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그보다 앞서 가수 설리(최진리)는 인터넷에서 ‘설인업’(설리 인스타그램 업로드의 준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사생활에 대한 대중 관심이 커지며 각종 악플과 루머를 감내해야 했다.
연예인이 아닌 누구도 악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지난해 12월 발생한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이후 온라인에서 유족들에 대한 악성 댓글이 계속되자, 경찰이 전담수사팀을 꾸려 명예훼손 혐의로 20명을 검거했다. 박한신 유가족협의회 대표는 “악성 유튜버와 저희의 가슴을 후벼 파는 댓글이 매우 심각하다”며 “그 내용이 죽을 때까지 기억될 것 같다”고 호소했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때도 유족과 사망자를 향한 선 넘는 욕설과 비난이 이어졌다. 당시 친구를 잃고 트라우마를 겪던 10대 생존자가 세상을 등진 이후 그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마약을 했다’는 가짜뉴스에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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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의 기억’ 되살리고 공유해야
지난 위기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극복의 힘은 국민에게서 나왔다. 1997년 외환위기가 ‘각자도생’의 부정적 태도를 낳았지만 ‘금 모으기 운동’의 경험을 남기기도 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금을 모읍시다’ ‘금모아 외채상환 뜻모아 경제회복’ 같은 구호 아래 많은 국민이 집에 보관 중이던 금반지, 목걸이, 금열쇠 등을 들고 나왔다. 일제 시대 일본이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기 위해 발행한 차관을 갚기 위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나섰던 ‘국채보상운동’의 현대판으로 평가됐다. 당시 국채보상운동 모금 장부에는 ‘읍내에 거주하던 정씨 부인이 은가락지 한 쌍을 냈다’고 적힌 부분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사태에서도 국민의 자발적인 동참이 위기 극복의 원동력이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을 비롯해 신속한 진단검사, 추적·치료 등에 국민 다수가 동참하면서 국제 사회에 ‘K방역’의 위상을 알렸다. 행정안전부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에 약 120만명의 국민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공동체 정신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위기 앞에서 힘을 합쳤던 ‘연대의 기억’을 잊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유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복지전달체계 개선, 민간 주도의 커뮤니티 활동, 고립가구 지원 등 사회적 안전망을 튼튼히 하는 제도적 뒷받침도 병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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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갈등을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되레 갈등을 부추기고 있고, 언론도 이를 기계적으로 중계하는 측면이 있다”며 “함께 사는 사회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가짜뉴스와 과장된 내용을 걸러내려는 이성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 사회가 성별, 세대, 정치성향 등 다양한 측면에서 갈등을 겪고 있지만, 모든 개인은 혼자 살 수 없고 결국 협력해야 한다”며 “공동체를 인식하기 위해 제도적인 차원의 변화와 개인의 노력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성준·박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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