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너지 통일로 연결됐으면
박정희 산업화 성과 부인 못해
소득 증대로 민주화 토대 마련
분단체제 극복 ‘보수 각성’ 필요
“자네, 한류 원동력이 뭔 줄 아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에게 물었다. 정 전 장관이 2006∼2007년쯤으로 기억하는 때, 그가 통일부 장관직에서 내려와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을 맡게 되자 김 전 대통령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정세토론을 하자며 불러 만난 자리였다. 정 전 장관이 “글쎄요” 하니 김 전 대통령은 “우리가 민주주의를 피 흘리며 쟁취한 거 아니요. 분신해 죽고 고문당해 죽고 그렇게 피 흘리면서 쟁취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 놓고 나니까 그 넘쳐나는 힘과 에너지를 발산하느라 2002년 월드컵 응원으로 분출됐던 거고, 이제는 예술로 발전을 시키는 거요”라고 했다.
지난달 19일 서울 중구 한 호텔에서 세계일보와 만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다. 해방 후 80년 가장 위대한 성취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단연 “케이(K) 데모크라시(민주주의)”를 꼽으며 이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그때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이번 윤석열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광장에 나온 국민을 보면서 그 생각이 났다”며 “국민은 한국 민주주의 회복력이 대단하다는 걸 전 세계에 보여줬고 앞으로 케이 팝, 케이 드라마, 케이 컬처처럼 ‘케이 데모크라시’가 다른 나라에도 상당한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산업화, 민주화를 압축적으로 이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가장 빠르게 뿌리내린 성공사례가 우리인데, 윤석열정권이 그걸 뒤집으려 했으니 ‘케이 데모크라시’의 잠재력이 폭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도 외형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이지만 태평양전쟁 후 미국을 통해 민주주의를 그냥 받아들인 것일 뿐 자민당 집권이 계속되고 엎치락뒤치락도 없다며 ‘케이 컬처’와 같은 성과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에너지를 통일 쪽으로도 연결하면 좋겠는데 북한이 저리 천리만리 도망을 가니까”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가 동족상잔의 아픔을 딛고, 케이 데모크라시를 보여줬으며 해방둥이로서 자신이 그 목격자임을 강조했다. 그는 가장 기억나는 사건을 이렇게 말했다.
“6·25 때 피란을 갔는데 지리산 빨치산들이 ‘보급투쟁’이라고 내려와 먹을 걸 가져갔다. 왠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그게 분단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알았다. 빨치산들 모습이나 행태에 대해선 분명 그림처럼 기억을 한다. 그런데 빨치산들이 올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우리 군, 경찰이 다음날 귀신같이 들어와 먹을 걸 빼앗긴 동네 사람들을 협조자라고 두들겨 팼다. 동네가 완전히 두 쪽이 났다. 공산당을 좋아할 수도 없지만, 저놈들도 너무하단 생각을 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이 들고 보니 그걸 동족상잔이라고 하더라.”
그는 대한민국 비약적 발전의 원동력을 묻자 “독재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정권 때의 압축적 산업화를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1962년도 박정희정권이 경제발전5개년계획을 시작하며 경제는 상승했는데, 여기 비하인드스토리도 있다. 원래 민주당 정권하에서 만들어 놓은 경제발전5개년계획이 있었고 박 전 대통령이 정권을 인수하고 보니 발전계획을 세워야 해 가져다 쓴 것”이라고 했다. 그는 “독재정권이 의도했건 안 했건, 박정희시대 산업화는 결국 소득증대와 중산층 증가로 이어지고, 이것이 민주화의 토대가 되는 사회발전 패턴을 지나왔다”고 했다.
정 전 장관은 대한민국 도약을 위해 극복해야 할 병폐로 분단체제 극복을 꼽았다. 특히 분단체제와 결착된 보수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역사 발전 과정을 보면 언제든 보수는 있다. 그러나 6·25 때 전 지구적으로는 냉전체제가 형성되며 한반도에선 분단체제가 고착화됐다”며 “북한에도 분단체제가 있어 반남정서 내지는 반남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남쪽은 반북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북한과의 대결을 전제로 해서 생긴 기득권 유지를 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반북·보수 속에서 카르텔이 형성되고 그 안에서 권력과 이권을 누리는 시대를 넘어서야 우리나라가 해방 100년에는 주요7개국(G7)은 물론 G5, G4 반열에도 오를 수 있는 것”이라며 “이번 광장에서 보여준 것처럼, 젊은이들이 부모로부터 세습되는 세계관을 끊고 스스로 자신들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어 나가길 바란다”고 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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