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누군가가 2024년의 대한민국 드라마를 돌아본다면, 인상을 남긴 새로운 얼굴로 누굴 꼽을 수 있을까. 물론 100이면 100의 지지를 받지 못할 수 있으나. 이 이름 하나는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배우 채원빈.
역할 때문이었겠지만 MBC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게 사람처럼 얼굴이 있다면, 그는 바로 채원빈이 연기한 장하빈의 얼굴이 아니었을까 싶다. 침착한 표정 위에 눈동자 안은 공허하지만 보는 사람을 깊숙이 끌어들이는 느낌을 주는.
이 표정과 눈빛만으로 채원빈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표현하며 결국 배신하지 않은 친밀한 딸을 연기해냈다. 그의 눈빛 하나로 많은 사람이 범인을 넘겨짚고, 서사를 달리 예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베테랑 한석규와 에너지를 맞부딪친 그의 모습은 꽤 오랫동안 모두의 뇌리에 남을 듯하다.
“굉장히 떨렸어요. 물론 주연이 아니었을 때도 촬영할 때 어려움을 겪지만, 주연을 하면서는 더 어려워지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마음단련을 많이 했는데요. 마인드 컨트롤을 많이 했어요. ‘원래 떨리고 그런 거다’라고요.”
장하빈은 극 중 장태수(한석규)의 딸로 원래부터 다른 이의 마음을 잘 공감하지 못하는 바탕이 있다. 그는 어린 시절 우연한 사고로 동생의 죽음과 연관되고 장태수와 아내 윤지수(오연수)의 불신을 받는다. 이후 고등학생이 돼서도 죽음에 연루되고 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아버지 장태수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된다.
“하빈이는 감정이 없는 친구는 아니고요. 그걸 표현하는 데 있어 미숙한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하빈이에 대해 계산을 하면서 연기한 것은 없고요. 초반에는 송연화 감독님이 하빈이에 대한 소스를 많이 주셨고, 제가 느끼고 연기한 하빈이가 합쳐지면서 점점 맞춰갔던 것 같아요.”
원래 표현을 못하는 편이 아니었던 채원빈은 장하빈의 깊은 감정과 억눌린 표현 때문에 스스로 마모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밝은 역할의 전작을 찍고 막 합류했던 초반이 그랬는데, 스스로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고 풀리지 않은 감정이 있어 많이도 울었다. 이 부분은 제작발표회에서 나온 약간의 울먹거림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개인적인 고민과 자책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감독에게 혼이 나서 그랬을 것’이라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더라고요. 그건 아닙니다. 감독님은 제가 많이 힘들 때 늘 답을 주려 하셨어요.”
어려운 하빈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아빠 장태수 역 한석규 역시 망망대해의 등대이자, 칠흑 같은 어둠의 길잡이가 돼줬다. 그는 한석규의 둘째 딸과 같은 병원에서 이틀 먼저 태어난 인연이 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한석규라는 큰 배우와 연기하는 경험은 채원빈의 연기 인생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됐다.
“제가 살면서 뵌 배우 중 가장 멋있는 어른이신 것 같아요. 제가 10년, 20년 후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면, 지금까지는 답이 없었는데 이제는 ‘한석규 선배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할 것 같아요. 연기를 떠나서 사람으로도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분이었고, 분명 한 프레임에 담긴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저를 믿고 선배님을 믿고 의지해야겠다는 마음만 먹었어요.”
한석규는 늘 채원빈이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필요로 하는 말을 해줬다. 한석규는 채원빈에게 “우리는 참 근사한 일을 하고 있다. 요즘 세상에 남을 깊게 공감하고,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이 얼마나 멋지냐”고 했다. 그런 말로 채원빈은 배우생활의 의지를 다시 한번 불태울 수 있었다.
“하빈이와 저는 아예 다른 성격이에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는 인물인데 그런 역할을 연기해본다는 자체가 큰 경험이었어요. 실제 부모님께서도 ‘너무 못됐더라. 저런 딸이 있었으면 힘들었을 것 같다’시면서도 많이 힘들었을 저를 이해해주셨어요. 이제 앞으로 공개될 작품에서는 다른 역할을 연기하니 앞으로 그런 식으로 저를 계속 풀어나가야 하겠죠.”
그의 차기작은 KBS2 드라마 ‘수상한 그녀’다. 사실 시기적으로는 ‘수상한 그녀’를 먼저 찍고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를 찍었다. 굉장히 자기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즐겁게 촬영했다. 공교롭게 먼저 찍은 작품을 나중에 공개하게 됐지만 장하빈과 또 다른 인물을 대중에 선보일 수 있다는 마음에 신이 난다.
“최근 신인상에 관한 기사도 봤지만, 저는 사실 상을 받은 기분이에요. 감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데 그 말씀 자체가 가장 큰 의미죠. 너무나 큰 감동입니다.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가 계속 궁금한 배우. ‘이 사람이 과연 이러한 인물을 하면 어떤 느낌이 날까’ 계속 궁금증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