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할 용기

2025-11-12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는 분노의 기록이기도 하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해 목숨 걸고 프랑코가 이끄는 군부 파시스트 세력과 싸웠건만, 오웰이 소속된 통일노동자당은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로부터 도리어 ‘파시스트의 앞잡이’로 몰린다.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고 스페인에 달려와 함께 전장을 누빈 용기 있고 재능 있는 청년들이, 다름 아닌 같은 편에게 체포된 뒤 간첩 누명을 쓴 채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오웰은 비통함을 느낀다.

지옥 같은 상황이었지만 인간적 감격을 느꼈던 한 순간도 있었다. 오웰은 함께 싸운 동료이자 상관인 콥 소령이 체포되자 그를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군의 고위층을 만나 편지를 전달하려고 시도한다. 수소문 끝에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비서 격인 한 장교를 만난다. 이 장교는 묻는다. “콥은 어느 부대에 근무했소?”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입니다.” 장교는 큰 충격을 받고 침묵에 빠졌다. 오웰도 극도로 긴장한다. 당장 간첩이라며 끌어내 잡아 가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 장교는 오웰의 말을 경청했고 편지까지 전달해준다. 비록 콥 소령을 석방시키지는 못했지만 인사한 뒤 헤어지려는 찰나, 장교는 잠시 망설이더니 다가와 오웰에게 악수를 청한다.

오웰은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 행동이 나에게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었는지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별것 아닌 악수지만 험악한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의심과 증오가 가득한 무시무시한 분위기. 사방에 거짓말과 헛소문이 난무했다. 게시판에는 나 같은 모든 사람이 파시스트의 간첩이라고 악을 써대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 그곳은 밀정이나 하수인과 같은 지저분한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 그의 행동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인과 공개적으로 악수하는 것과 같았다.”

오웰이 겪었던, 이념이 인간성을 압도하는 삭막한 분위기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극단적인 정치 대립 지형과도 닮아 있다. 경향신문은 창간 79주년 기획으로 허위조작정보 문제를 다루면서, 이른바 ‘극우’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의 대화 내용을 분석했다. 이 채팅방은 거짓말과 헛소문, 적의로 가득했다. 수많은 허위조작정보가 사실처럼 공유되고 있었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예컨대 이들은 정신건강증진법 일부 개정안이 윤석열 탄핵 반대 집회에 나간 이들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법이라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해당 입법예고를 클릭해 보기만 해도 단순 자구 수정임을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최근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의 장기이식법 개정안을 두고 “강제로 장기를 적출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려 입법을 좌초시킨 이들도 비슷한 무리일 것이다.

허위조작정보 문제는 정치적 양극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지능력이나 문해력, 지식수준의 문제만이 아니다. 알고리즘 이해도와 허위조작정보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정묘정 노스이스턴대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알고리즘 이해도가 높다고 반드시 허위정보에 덜 속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특정 성향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정보는 사실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에 부합하는 허위정보는 쉽게 믿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는 연구 결과가 활발히 보고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현 연세대 디지털사회과학센터 연구교수는 “이 채팅방 참여자들은 사실 아주 비판적이고 분석적이며 팩트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서 “그런 비판적·분석적 능력을 적이나 비판 대상에게만 사용하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입맛에 맞는 사실만 골라 대안적 세계를 쌓는데 빠져 있는 셈이다. 김 교수는 이런 상황에선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는 ‘지적 겸손’을 갖추는 게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극우 채팅방뿐만 아니다.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상대방의 말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하기보다 낙인찍고 배제하려 드는 모습을 자주 접한다. 죽음의 담장 위를 걷는 그 순간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상대편의 말을 경청했던 그 장교의 용기를 곱씹어본다. 그가 청한 악수는 단순한 손 내밀기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우리가 목소리 높이기 전 배워야 할 어떤 태도가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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