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5년, ‘백화당가’ 이야기

2025-03-05

“백안이칙, 원덕원례…” 실제 가사는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대략 이런 형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정 인물의 ‘자(字)’ 수십 개를 이어 붙였다고 하니, 암호 같은 말도 이해는 된다. ‘자’는 태어날 때 받은 ‘이름(名)’과 달리, 지금의 성년식에 해당하는 관례 이후 받는 또 다른 호칭이다. 자는 대체로 두 글자로 이루어지니, 두 사람의 자를 이어 붙이면 네 음절이 딱딱 맞아 노래 가사로서도 그만이었을 터였다. 1795년 1월 말 한양에 나돌았던 <백화당가(白華堂歌)> 이야기다.

이 가사는 당시 권유의 탄핵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정동준과 관계돼 있다. 정동준은 정조의 초계문신 출신으로, 학문이 뛰어나 오랫동안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정조의 총애를 받자 뇌물까지 바치며 따르는 사람들도 있어서, 근 5~6년 사이에 수십만 냥을 모았다고 했다. 한양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몇채나 두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탄핵으로 끝이 났다.

정동준에 대한 탄핵은 그의 개인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정동준은 벽파(僻派)와 대립했던 시파(時派)의 인물이었다. 당시 조정은 정조 정책을 지지하며 따른 사람들을 시류에 편승한다고 해서 시파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사람들을 벽파로 불렀다. 벽파 영수는 재상 김종수에 이어 이조판서 윤시동, 병조판서 심환지와 같은 인물이었으며, 시파 영수는 재상 김이소와 이병모, 판서 서유린 등이었다.

특이하게도 시파와 벽파는 왕에 대한 지지 여부로 갈렸기 때문에, 벽파 입장에서는 왕도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다. 싸움의 수위와 위험성이 컸던 이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이 총애한 시파 인물이 부패 혐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벽파로서는 시파 전체를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시파는 여전히 왕의 정책 지지자들이니 이들 전체를 바로 탄핵하고 나서기에는 부담이 컸을 터였다. 시파 인물들이 겉으로는 왕을 따르지만 실제로는 정동준처럼 부패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중요했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정조는 이전에 자신이 총애하던 정동준에게 집을 하사한 적이 있다. 그 집에는 백화당(혹은 백화정)이라 부르는 정자가 있었는데, 정동준은 왕의 총애를 상징하는 이곳에서 자주 연회를 열었다. 당연히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이 백화당 연회에 참여했는데 여기에는 간혹 벽파 인물도 있었지만 대부분 정동준과 같은 시파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백화당 연회에 참여한 사람의 ‘자’를 가사로 만들고 이를 시중에 퍼트린 이유였다.

사람을 부르는 공식 호칭인 ‘이름’과 달리 ‘자’는 비교적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친밀하게 부르는 호칭이다. 굳이 자를 가사로 만든 이유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백화당가>를 만든 사람들은 자를 통해 백화당 연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끈끈한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그들 모두가 정동준과 비슷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노상추가 <백화당가>를 벽파의 행위라고 기록한 이유였다( <노상추일기>).

당시 이 노래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있던 시파 인물들은 모골이 송연했을 터였다. 백화당 연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처단하겠다는 의지가 없다면, 굳이 이런 노래를 퍼트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이 가사는 그대로 살생부가 될 수도 있으니, 벽파는 시파를 더 이상 정책에 이견이 있는 사람들로 보는 게 아니라, 처단해야 할 적으로 규정한 듯하다. 실제 5년 뒤, 정조의 사망은 벽파에게 ‘처단’의 기회를 허락했고, 이후 조선의 역사는 그나마 존재했던 다양성의 ‘정치’가 실종되는 시기로 접어들었다. 230년이 지난 오늘, 가사만 바뀐 새로운 <백화당가>가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확인되는 게 유난히 걱정스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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