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1945년 일제 패망 후 일본에 남은 이들…조선인연맹과 거류민단

2024-10-04

김천해가 1945년 10월 10일 후추형무소에서 출소했을 때 수백 명의 조선인이 달려와 환영했다. 재일조선인들은 10월 1일부터 정치범 석방이 시작된 후 김천해가 포함되는지 주목해왔다. 해방 직후 일본 내 조선인들이 만든 단체는 한때 300개에 이르렀다가 군소단체를 규합해 전국적인 단체 결성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9월 10일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준비위원회”가 설립됐다.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 조련)이 10월 15일 전국대회 개최를 예고하고 있던 시점에 김천해 석방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10월 10일 오전 10시, 예방구금된 비전향 수감자 16명이 출소한다는 기사를 보고 김천해의 동지들 뿐 아니라 전국에서 조선인들이 한걸음에 달려왔다.

조련 준비위는 트럭을 앞세우고 “해방전사 출옥 환영”이라고 적은 대형 깃발을 흔들면서 김천해를 기다렸다. 이날 환영 군중 중 절반 가까이가 김천해를 기다린 조선인이었다.

김천해가 외친 “조선의 완전독립”

후추형무소 정문을 통해 출소한 16명이 군중 사이로 걸어 나올 때 큰 환호성이 울렸다. 이날 김천해와 함께 석방된 일본공산당의 도쿠다 규이치徳田球一)와 시가 요시오(志賀義雄)가 ‘천황제 타도’와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하자고 발언해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김천해는 ‘일본제국주의와 군벌의 박멸’, ‘노동자 농민의 정부 수립’ 그리고 ‘조선의 완전독립과 민주정부의 수립’을 언급하며 환영에 답하는 연설을 했다. 형무소 앞에서 열린 환영식을 마친 대오는 이후 후추역까지 거리 행진을 했다.

김천해는 도쿠다와 함께 조련에서 준비한 트럭을 타고 현재 도쿄 신바시(新橋)에 있는 일본비행협회회관(현재는 항공회관으로 신축)으로 이동해 건물 5층에서 열린 ’출옥 동지 환영 인민대회‘에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조련뿐 아니라 일본공산당 등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지만, 후추에 예방구금됐던 이강훈도 이념을 개의치 않고 동행했다. 대회를 취재한 신문들은 참석 인원이 2000~3000명에 이르렀고 그중 조선인이 다수였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재일조선인의 지도자로서 김천해를 향한 존경이 뜨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조련이 연합군 사령부에 대한 감사를 전했다는 기사와 함께 석방된 김천해의 연설을 보도했다. “우리들은 이제야 우리가 원하는 정치형태를 선택하여 조선 독립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과 일본 천황제를 비난했다고 전했다.

대회를 마친 참석자들은 거리 행진을 이어가 지요다구(千代田区)에 있는 GHQ(연합국사령부) 앞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해산했다. 이 행진은 일제 패망 후 도쿄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중 시위로 기록된다.

조련 창립대회, 김천해 고문

1945년 10월 15일, 재일본조선인연맹이 정식으로 창립됐다. 도쿄의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열린 전국대회는 지역 대표들을 포함해 4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조련은 ‘해방된 독립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지도록 재일한인을 계몽, 통제하는’ 것을 단체를 창립한 목적으로 밝혔다.

조련이 1회 전국대회에서 천명한 강령은 모두 6개 항으로 다음과 같다. ①신조건설에 헌신적 노력을 기한다. ②세계평화의 항상적 유지를 기한다. ③재일동포의 생활안정을 기한다. ④귀국동포의 편의와 질서를 기한다. ⑤일본 국민과 호양우환을 기한다. ⑥목적 달성을 위해 대동단결을 기한다.

초기 조련의 사업 역시 조선 귀환자 명부 작성, 귀환 증명서 발행, 잔치 재산 관리, 생활 상담, 국어 학습 그리고 당면한 민생문제 해결 등이었다. 모두 해방 직후에 재일조선인 사회가 마주한 현안에 관련된 사항으로 이념이 부각되지 않았다.

초대 위원장은 윤혁, 부위원장은 김정홍, 김민화가 맡았다. 한덕수는 가나가와현 본부장이었고 2차 전국대회에서 총무부장에 선임됐다. 갓 석방된 김천해는 최고 고문으로 추대됐다.

재일조선인 귀국과 잔류한 재일동포

재일조선인은 해방 직전 약 240만 명이 달했는데, 1945년 8월 이후 6개월 만에 약 94만 명이 귀국했다. 일본 정부가 발표한 귀국자는 약 140만 명이었지만 통계에 잡히지 않은 숫자를 더하면 180만 명에 이른다.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은 60만 명에 이르렀다. 1950년 일본 정부에 외국인으로 등록한 재일한국인 수는 약 54만 명이었다. 출신지로 구성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수가 울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역으로 1952년 기준 39% 19만6000명에 달했다. 북한지역은 겨우 3.6%밖에 되지 않았다.

왜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후 재일동포로 남게 됐는가에 대한 여러 분석이 있다. 미국 점령군사령부가 조선인이 귀국할 때 소지할 수 있는 현금을 1000엔 그리고 화물은 250파운드(약 113kg)만 허용했던 것을 첫 번째 원인으로 꼽는다. 조련, 일본공산당과 연계된 재일조선인 세력이 컸기 때문에 남한으로 귀국을 포기한 경우도 있다. 특히 1948년 이후 사회주의 계열이 남한으로 귀국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경제난과 국내 정치 환경에 따라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독특한 점은 일본 법무성의 195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을 국적으로 선택한 이는 4만 명(7.4%)에 불과하고 조선(북한)을 선택한 경우가 50만 명(92.6%)에 달한 것이다. 북한지역 출신이 2만 명도 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의외의 숫자다. 이런 국적 선택은 1996년 이후에 역전됐으니 해방 후부터 30년 넘게 북한국적이 많았던 것이다.

재건된 일본공산당의 조선인부

김천해는 10월 19일, 오사카에서 열린 출옥 동지 환영대회에도 참여했는데 이날은 1만5000명이 모였다. 이 시기 김천해는 재일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이름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김천해는 1945년 12월 1일부터 3일까지 열린 재건된 일본공산당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고 7명의 정치국원에 포함된다. 그리고 일본공산당 내에 설치된 조선인부 부장으로 선임됐고 부부장은 김두용이 맡았다.

김천해가 왜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는지 의문이 있지만, 그는 일국 일공산당이라는 원칙을 따랐다고 말한다. 이 점은 1945년 말 일본공산당 회의에서 조선인부 대표로서 발언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일본지부를 만드는 것보다 일본에 있는 동안은 일본공산당에 참가하고, 귀국하게 되면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일본공산당 입당을 희망하는 조선인이 많은 것에 대해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대중의 지지를 받는 데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귀국을 희망하는 조선인이 있다면 돕고 지지해야 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리고 재일조선인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상적인 문제 해결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직장을 잃고 새로운 환경에 놓인 동포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김천해와 김두용을 비롯해 지도부들이 일본공산당에 가입하면서 조련은 점차 이념적인 성격을 드러내면서도 초기부터 친일파 처단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방침의 친일은 단순히 일본인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일본제국주의 옹호 세력과 잔존 세력에 대한 확고한 거부와 같았다.

반공을 앞세운 재일거류민단 발족

조련이 친일파 축출과 척결을 시작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며 반공을 내세우고 이탈한 이들이 1945년 11월,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을 결성한다. 그리고 1946년 1월, 박열을 대표로 신조선건설동맹(약칭 건설동맹)이 결성된다.

두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안에 대한 찬반 대립이 가속화된 1946년 상반기를 거쳐 통합을 협의했다. 그 결과가 1946년 10월 3일 도쿄에서 결성한 재일본조선거류민단(약칭 민단)이다.

민단의 초대 단장으로 박열이 선임됐다. 김천해와 박열, 일제강점기 오랜 투옥 생활을 한 두 독립운동가가 향후 재일한인 사회를 양분하는 조총련과 민단의 출발점에서 각각 상징이 됐다. 민단은 조련이 강제 해산된 1949년까지 끊임없이 조련과 대척점에서 유혈 충돌 사건까지 벌였다. 당시 조직의 규모는 조련이 압도적으로 컸지만, 민단은 일본과 남한을 점령한 미군 연합국사령부의 유무형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박열과 장상중, 두 사람의 인연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아키다형무소에서 석방됐다. 김천해보다 약 5년이 긴 22년 2개월동안 수감됐다. 장상중, 원심창 등 흑우회부터 함께 했던 동지들이 박열을 중심으로 건설동맹과 민단 결성까지 행보를 함께했다.

울산 출신 재일조선인으로 박열 등과 함께 아나키즘(무정부주의) 단체 활동을 했던 장상중은 1923년 불령사 사건 때 석방된 후 사형이 선고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바라지를 했다. 가네코가 자결한 후 형무소에서 가매장한 유골을 되찾는 일도 장상중이 앞장섰다.

그 뒤로도 무산학우회, 조선자유노동조합, 흑우연맹으로 이어지는 재일 아나키스트 운동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그 중 조선자유노조는 규모는 작지만 재일조선노총과 여러 차례 유혈 충동을 불사하며 대립했다. 그리고 상애회 등 친일 반동조직을 공격했다. 그랬던 역사를 본다면 일제 패망 후 무정부주의 대신 반공을 앞세운 민족주의로 변모한 과정을 일정부분 이해할 수 있다.

박열이 출옥할 때 장상중은 정원진, 한현상과 함께 아키타형무소 앞에서 박열을 기다렸다. 아키타에서 오다테로 기차를 타고 이동했는데 도착한 역 앞에 군중 1000여 명이 있었다. 대부분 아키타현 조련에 속한 이들이었다. 박열이 출옥 후 요양했던 곳도 아키타현 조련 준비위원회 본부로 사용한 정원진의 집이었다.

그런데 출옥 전 10월 20일, 아키타 사키가케신보에 박열이 옥중 생활 중 1935년 심경이 바뀌어 사상 전향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부분은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는 부분이지만, 당시 조련은 민단 단장으로 선출된 박열이 천황주의자로 변절했다고 맹비난했다. 아키타에서 요양을 마치고 12월 7일 도쿄에 도착했을 때 환영 인민대회까지 열었는데 반동단체(민단)의 거두가 됐다는 손가락질도 받았다.

장상중은 그런 논란에 개의치 않고 박열에 대한 존중과 후원을 멈추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6년 2월, 박열 후원회가 만들어질 때도 함께 했고, 이후 1946년 12월 5일, 박열의 옥중투쟁을 기록한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저서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발행될 때 공저로 이름을 올렸다. 그 뒤로 장상중이 살아간 행보는 확인이 어렵다. 민단의 간부 명단, 박열이 국내에 귀환했을 당시의 사진과 자료에도 장상중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배문석 시민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