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상품 된 군함도… 역사도 미래도 없었다 [밀착취재]

2025-08-13

광복 80년, 한 서린 나가사키를 가다

日 전후 부흥기 자긍심 자극

조선인 관련 내용 은폐 급급

한글 자료엔 대일청구권 포기

韓 측 주장 반박 영상만 있어

日 시민사회 ‘조선인 피해’ 양심고백 공개… “인정·성찰해야”

풀뿌리 운동으로 세운 인권평화자료관

“절대로 도망갈 수 없는 감옥도” 증언

“야외 노동 조선인 많아 피폭 피해 많아”

원폭자료관에선 당시 비극 상황 소개

“식민 지배·침략전쟁 책임 다해야” 지적

“48호동 지하에는 무려 파친코가 있었습니다. 미쓰비시가 경영한다는 소문이 있었죠. 그게 사실이라면 미쓰비시에서 일하고, 미쓰비시에서 월급을 받고, 절반쯤은 미쓰비시에 돌려줬던 셈이겠죠.”

지난 6일 일본 규슈 서쪽 나가사키에 있는 군함도 디지털 박물관. 1953년 군함도에서 태어나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는 기노시타 미노루씨가 섬 축소 모형 한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길이 480m, 폭 160m의 작은 섬에 한때 5300명이 살아 도쿄의 17.5배 수준 인구밀도였다며 학교, 영화관, 유치장 등 섬 내 시설을 소개했다. 이어 “약 600m, 도쿄 스카이트리 높이만큼 지하로 내려간 뒤 또 1000m를 이동해 기온 35도, 습도 95%의 혹독한 환경에서 (광부들이) 일했다”며 “거기서 캔 석탄이 일본을 지탱했던 것”이라고 했다.

정식 이름이 하시마(端島)인 이 섬은 1890년 미쓰비시가 인수해 개발했다. 양질, 고가의 석탄이 나오자 흙과 바위로 주변을 메워 확장하고 콘크리트 방파벽을 세웠다. 인부들을 상주시키기 위해 지은 고층 아파트까지 들어선 모습이 일본 해군 전함을 닮았다고 해 군함도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군함도는 스코틀랜드 출신 무기 상인 토머스 글로버의 옛 주택(구라바엔) 등과 함께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라는 이름으로였다. 전체 23곳 중 7곳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노역 시설이다.

일본은 대상 시기를 1910년까지로 한정해 강제동원 역사를 피해가려는 꼼수를 부리다 한국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자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권고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 약속은 10년째 물거품이다. 박물관에선 강제동원은커녕 조선인 관련 내용조차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이곳은 석유로 에너지 전환이 이뤄짐에 따라 1974년 이후 폐허가 된 군함도에 대한 향수와 전후 부흥기 자부심을 자극하는 관광상품이 돼 있었다. 군함도 숙소를 복원한 공간에서는 일본인 관람객들이 “누추하지만 사양 말고 들어오세요. 차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같은 농담을 하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에는 TV 등 각종 가전제품이 비치돼 있다. 1950, 60년대 고급 인력이 몰려 고임금을 받았던 까닭에 TV, 냉장고, 세탁기 등 이른바 ‘3종신기’(三種神器) 보급률이 높았다는 설명이다. 1층 매표소 옆에선 섬 아래 탄광이 있는 모양의 캐릭터를 이용한 자석, 과자, 티셔츠 등을 팔고 있었다.

◆‘바다의 다이아몬드’로 상품화한 군함도

선사 여러 곳이 운영하는 군함도 투어도 거의 3주치가 매진 상태다. 직원에게 물었더니 “방학 기간에는 거의 만석”이라고 했다. 열흘 전 어렵사리 예매한 6일 오후 배편은 한여름 맑은 날인데도 그날따라 바람이 세고 파도가 높아 결항했다. 군함도가 ‘지옥도’라고 불렸던 이유 중 하나인 바로 그 파도다. 가혹한 노동과 차별을 피해 달아나려 해도 살인적 조류 때문에 탈출이 불가능했던 섬.

배가 떴다면 길 건너 선착장에서 출발했을 터다. 바다 반대편에 군함으로 추정되는 선박과 대형 크레인 여러 대가 보이는 곳이다. 크레인에는 나가사키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붉은 로고가 박혀 있다. 세 개의 마름모, 미쓰비시(三菱)다.

지난해 일본에서 방영된 드라마 ‘바다에 잠든 다이아몬드’는 군함도 열풍에 다시 불을 지폈다. 올 1월엔 군함도행 배편 예약건수가 전년 동월 대비 61% 증가했다고 한다. 박물관 내부에는 드라마 등장인물이 입은 것과 비슷한 의상을 입어볼 수 있는 코너가 있다. 옆에는 ‘진격의 거인’, ‘007 스카이폴’ 등 군함도가 등장하는 영화 포스터도 여러 개 붙어있다.

한글로 된 자료는 두 곳에 있었다. 하나는 1965년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 관련 설명이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금을 받고 ‘징용공’(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식 표현) 미지급금 등 대일 청구권을 포기했으며, 향후 일절 청구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빨간색 글씨로 강조돼 있다.

다른 하나는 모니터가 달린 DVD 플레이어다. 강제동원에 관한 한국 측 주장이 왜곡됐다고 반박하는 영상을 한글 자막으로 볼 수 있게 해놨다. 바로 옆엔 ‘누가 역사를 날조하는가? 군함도는 지옥섬이 아닙니다’라고 적힌 팸플릿 견본이 놓여 있었다. 지난 1일, 도쿄 산업문화유산센터에서 봤던 것과 동일한 책자다.

센터는 군함도 등 23개 세계유산을 소개하는 시설인데, 유산이 하나도 없는 도쿄 신주쿠구 주택가의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설치됐다. 유산이 가장 많은 나가사키에서는 1000㎞쯤 떨어진 곳이다.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고 사진 촬영은 금지다.

이곳은 200년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이, 세계를 향해 열린 유일한 창 나가사키에 살던 외국인 글로버 등의 도움을 받아 ‘동양의 기적’이라 불리는 산업혁명을 이뤄냈다고 주장한다. “사무라이들이 한 손에 서양 책을 쥐고 반세기 만에 근대국가의 기반을 구축했다”는 식이다. 그 중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의 사진이 밀항 형식으로 영국 유학길에 오른 ‘조슈(長州) 5걸’ 중 한 명으로 걸려 있다.

3개관 중 하나는 전체가 군함도를 다룬다. 섬 출신 등 10여명의 대형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고 그중 3명의 증언은 별도 패널로 만들어졌다. 1944년부터 갱내 측량사로 일했다는 남성 등이 “조선인에 대한 학대는 본 적이 없다”, “위험한 일이라 연대감이 강했다”며 학대와 차별을 부정하고 있었다.

재일교포 2세인 고 스즈키 후미오씨는 “주변엔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며 “아버지는 오장(伍長)이었고 부하 중엔 일본인도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다른 전시물에 나오듯 일본은 전시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1939년 국민징용령을 통해 군수공장 등에 동원을 시작했다. 그런데 스즈키씨는 1933년생이고 전쟁 격화 후 섬을 나왔다고 했다.

◆가해 역사 직시하는 일본 시민사회

이들 증언을 강제동원 당사자의 말로 반박하는 곳이 있다. 일본 시민사회 풀뿌리 운동으로 건립된 나가사키 인권평화자료관이다. “14살 때인 1943년 9월 빨간색 징용 종이가 왔다. 수천 명과 함께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로 보내졌다. 이 중 300명의 종착지가 하시마였다”는 고 서정우씨의 회고가 소개돼 있다. “조선인들은 모퉁이 건물 좁은 방에 7, 8명이 함께 있었다”, “일을 쉬려 하면 ‘네, 일하러 갑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맞았다”, “절대로 도망갈 수 없는 감옥도였다”는 토로가 이어진다. 다른 탄광이지만 “조선인 노무자의 식사에선 쌀알을 볼 수 없었다”는 일본인의 고백도 있다.

이곳은 드론으로 촬영한 군함도의 VR 영상을 “하늘을 날듯 새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고 자랑스레 홍보하는 디지털 박물관과 달리 소박한 수작업 전시물이 대다수다. 대신 일본군 위안부, 난징 대학살, 731부대 등 일본 정부가 애써 외면하는 가해 역사도 정면으로 다룬다. 자료관의 사키야마 노보루 이사장은 “일본 정부도 과거 식민지 지배나 침략 전쟁에 대한 책임을 다해 다시는 같은 과오를 반복하는 일 없이 핵 폐기와 평화 실현을 힘써야 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군수산업도시로 성장하던 나가사키에는 강제동원돼 혹은 생계를 위해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일본 내무성에 따르면 1944년 기준 나가사키현 거주 조선인은 5만9573명. 이듬해 8월9일 이곳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비극은 형언할 수 없는 강도로 증폭된다. 조선인 2만2198명이 피폭됐고 그중 1만명가량은 수개월 내 숨진 것으로 추산된다.

자료관 앞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그 아래 공중화장실 앞 원폭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를 지나 길을 건너면 평화공원이다. 지난 7일 들른 이곳은 천막 설치 등 이틀 뒤 열릴 ‘원폭 희생자 위령 평화기념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임시로 설치된 패널은 1945년 7월16일 인류 최초의 원폭 실험부터 대상지 선정, 투하까지의 경과만 건조하게 담은 채 일본의 피해를 부각하고 있었다.

곳곳의 단체 관람객 중 한 무리의 설명 자료에서 ‘전쟁은 최악의 인권 침해’, ‘강제연행’ 등 문구가 눈에 띄었다. 다가가 물어보니 나가사키의 중학교 교사 가나다 마사시씨가 니가타현에서 온 동료 교사들에게 평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중이었다. 가나다씨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 시기 일본이 저지른 끔찍한 일을 제대로 알리고 반성해야죠. 가해 역사를 인정하지도 성찰하지도 않고서 핵 폐기를 호소한다면, 어느 누가 제대로 찬동하겠습니까.”

나가사키·도쿄=글·사진 유태영 특파원 anarchy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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